“모란시장에 오면 사람 냄새가 나요”

[기획연재] 재래시장의 역사와 기능③ 모란시장의 하루(상)

최방식 기자 | 기사입력 2009/09/20 [14:39]

“모란시장에 오면 사람 냄새가 나요”

[기획연재] 재래시장의 역사와 기능③ 모란시장의 하루(상)

최방식 기자 | 입력 : 2009/09/20 [14:39]
“조선 사람들이 최대의 즐거움은 장을 보러 가는 일이다. 조선에는 상점이 거의 없고 매 5일만에 장이 열리면 그곳에서 자기가 만든 물건을 바꾸고 자기의 의견을 교환하기 때문이다. 장터에서는 물건을 사고팔고, 행상을 하고 남의 얘기를 늘어놓는 일 외에 기분풀이로 술 마시고 싸우는 일이 허다하다. 옷감을 사러 왔다가 빈털터리가 되어 돌아가는 농부도 흔히 있지만 마냥 즐겁기만 하다.”

19세기 말 조선을 여행하며 본 바를 ‘은자의 나라, 한국’이라 책으로 엮어낸 미국인 그리피스 목사(동양학자)의 눈에 비친 저자거리의 모습이다. 대한제국의 멸망을 예고했던 저자. “세계를 모르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닫힌 나라”라는 부정적 글을 썼던 이다. 그의 눈에도 조선 장터의 경제·사회적 기능과 그 역동성이 흥미로웠던 모양이다.

각설하고, 조선시대 생겨나 먹을거리와 생필품, 그리고 공상품의 유통을 도맡아왔던 장시(場市). 정보의 수집·배포, 오락과 흥의 터전이었으며, 이웃과 만남의 장이 돼 온 장터. 서구에 ‘광장’이 있다면 우리에겐 ‘저자거리’가 있다고 할까. 이제 그 명운이 다했는지 민속장·재래시장은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하여, 본지가 재래시장의 역사와 기능, 재벌들의 골목상권 대공습에 맞선 동네상인들의 반격을 조명하는 기사를 연재한다. 민속시장을 중심으로 쇠락해가고 있는 전국 700여개 전통 5일장의 모습과 이들의 현주소를 몇 차례 나눠 살펴볼 예정이다. 그 첫 기획으로 성남 ‘모란시장의 하루’를 싣는다. /기자주
 
▲ 늦여름 어느 월요일 정오 모란장에 막 들어서는 데 광대모습을 한 이들이 호객행위를 하고 있다.     ©최방식 기자
▲ 모란시장에 가면 흔하게 보는 광경. 한 때 전국 개고기의 30%를 유통하는 역할을 했으니... 애처로운 견공의 모습이 카메라에 담겼다.     © 최방식 기자

 
“최대 즐거움, 장보러가는 일”
 
“모란시장에 오면 사람 사는 냄새가 나요. 신바람이 난다고 해야 할까요? 눈이 즐거운 것도 그렇고. 흥정하는 재미가 또 얼마나 쏠쏠한지... 먹을거리와 생필품까지 8도 특산물 없는 게 없죠. 파전에 막걸리 한잔은 또 어떻고. 이런 맛에 재래시장에 온다니까! 곧 이사 간다는데 어찌 되려는지 모르겠어.”

모란시장 한 귀퉁이 포장마차에서 만난 한 노인장의 말이다. 시장을 두어 바퀴 돌다 지쳐 술이나 한 잔 하며 쉬려고 막 의자에 걸터앉는데 환한 얼굴로 맞는 이가 있다. 막걸리 잔을 기울이다 말고 자리를 고쳐 앉으며 반긴다. “어서 와요. 젊은 양반. 시원하게 한 잔 마셔야지. 정말 죽여줘...”

따가운 늦여름 햇살이 탄천 위로 한 없이 쏟아지던 늦여름 어느 월요일. 재래시장에, 것도 서울을 벗어나 장 볼일이 딱히 없는 기자가 묵직한 망원 카메라까지 둘러메고 모란장에 나타난 것 다 까닭이 있다. 재래시장, 골목상권 이야기를 써보려는데 아무리 뒤져봐도 이미지가 없는 거다.

4일, 9일만 서는 장날에 맞추려다 보니 묘하게도 월요일이 됐다. 버스로 한 시간여 달렸을까? 시장 들머리로 다가서는 데 주초인데도 북적거린다. 하기야 모란시장 하면 수도권에서 가장 크다는 장터 아닌가? 그 명성이 어느 정도인줄 알 리 없는 기자, 그저 눈짐작만 해볼 뿐이다.
 
▲ 두시간여 시장을 돌다 지쳐 앉은 포장마차. 장사가 안돼 죽을 맛이라는 주인은 벌써 몇 잔 했다. 고향의 오빠라는 분도 참 오랫만에 들렸다며 거     ©최방식 기자

▲ 재래시장에 가면 늘 볼 수 있는 풍광. 민물에서 잡은 고둥, 미꾸라지, 새우, 올갱이들을 담아놓은 그릇들의 동그란 세상이 정겹다.     ©최방식 기자

 
“젊은 양반! 한잔해, 정말 죽여줘...”
 
들머리는 꽃 장사들 차지. 상인들에게 물어보니 화훼, 잡곡, 약초, 의류·신발, 잡화, 생선, 야채, 음식, 애견, 고추(도·소매), 가금 순이란다. 누가 정한 질서인지 알 길은 없으나 짐작은 간다. 시장 밖 사람들에게 깨끗이 보이려고... 본래 지저분한 걸 감추려 한다고 어디 감춰지나?

모란시장 하면 개고기 아닌가? 국내 유통량의 30%를 차지했다니. 개고기 장터는 시장 초입부터 오른쪽으로 길게 늘어서 있다. 상설시장 쪽을 끼고 늘 장이 서는 셈이니 숨기려 한다고 그리 되는 게 아니다. 하여튼 꼴불견이거나 위생상 문제가 있는 판은 안쪽에 배치했단다.

꽃 사이를 지나 잡곡·약초 장터로 접어드니 그 제서야 장에 온 느낌이다. 비릿하고 구리기도 한 어물전 냄새가 확 풍겨온다. 흥정 소리에 호객 악다구니도 그저 정겹다. 구석구석을 돌며 물건을 고르는 노신사, 장바구니를 들고 생선을 만지작거리는 아낙. 모두가 고즈넉하다.

한데 이런 낭패가 있나. ‘헝그리망원’에 시장 구석구석을 담는 게 쉽지도 않았지만, 카메라를 들어 올리면 상인·행인이 일제히 쳐다보니. “저놈이 뭐하는 거여, 지금” 소리가 귀전을 때리는 듯하다. 건 그렇다 치고, 원찮게 찍히는 이들 초상권은 또 어쩌나? 명예를 훼손하지 않으면 되겠거니 생각하고 싶은데 그게 어디 내 맘대로 인가?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꾀를 짜냈다. 술판에 앉는 것이다. 막걸리까지 한잔 들이키면서 괜찮은 광경이면 슬쩍 찍어보자는 거다. 한데, 이를 어쩐다. 시장통을 온통 천막으로 덮어놔, 딱 노출부족이니. 어쩔 도리가 없다. 감도 높이고 그냥 찍어댈 밖에... 운에 맞기고...
 
▲ 수도권 최고의 닷새장 명성을 간직한 모란장. 대형유통할인매장에 밀리고 이제는 골목상권을 접수하려는 대기업의 동네소형마트에 밀려 찾는 이가 크게 줄었다.     © 최방식 기자

▲ 모란장 한 가운데서 인삼을 팔고 있는 아주머니. 손님은 없고 혼자서 삼뿌리만 만지작거리고 있다.     © 최방식 기자

 
“조가 움직였는데, 이젠 끝났나봐”
 
50대 후반의 포장마차 주인은 진도가 고향이라고 했다. “요즘엔 통 손님이 없어요. 오늘도 10만원 매상도 못 올리고 있구만.” 첫 마디가 푸념이다. 모란장, 안양장 두 개를 번갈아 가며 장사를 하고 있다는 그녀. 벌이가 시원찮아 다음 주부터 용인장까지 뛰기로 했단다.

“십수년 여기서 벌어먹고 사는데, 옛날엔 정말 대단했죠. 모란장에서 조가 움직인다고 했거든요. 이 쬐그만 포장마차로 하루에 1백만원 매출까지 올려봤어요. 잘 나갈 땐 월 6백만원 벌었으니 여자 벌이로 그 정도면 괜찮았죠!” 모란시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고 싶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벌이만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모란시장의 역사를 알아보니 예상밖이다. 그 역사가 50년밖에 안됐다. 충청 강경장에서 함경 원산장, 그리고 경상 마산장까지 조선팔도 사람이면 다 아는 장들은 그 역사가 무려 300년. 1770년 집필된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 따르면, 장시(場市)는 평안도 134개, 강원도 68개, 경기 101개, 충청 157개, 전라 216개, 경상 278개 등 총 1천64개나 된다.

모란장은 그러니까 2백년이 넘게 명맥을 이어온 여느 장시들과는 태생이 다른 셈이다. 박정희 쿠데타와 함께 시작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개발독재시절 수도 서울을 막개발하며 서울시내 민속장을 모두 없애자 그 수요가 모란장으로 몰린 것. 이때부터 유명세를 가진 듯. <다음 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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