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린쥐, 스크린도어, 그리고 세종대왕

[길거리통신] “유식·유능 잣대가 영어인 웃기는 사회, 기자질 창피해”

최방식 기자 | 기사입력 2009/10/09 [00:15]

아린쥐, 스크린도어, 그리고 세종대왕

[길거리통신] “유식·유능 잣대가 영어인 웃기는 사회, 기자질 창피해”

최방식 기자 | 입력 : 2009/10/09 [00:15]
출근길에 기분 좋은 글이 눈에 들어왔다. 7호선 한 역사인데 며칠 전까지만 해도 ‘우측보행’이라고 써놨더니 ‘오른쪽 걷기’라고 고치고 괄호 안에 전에 썼던 음을 병기해 넣었다. 그 역만 그런 가 궁금했는데, 5~8호선이 전부 바뀌었다. 서울도시철도공사를 칭찬해줘야 할 성 싶다.

말 나온 김에 하나 더 해두자. 전철을 탈 때마다 귀에 거슬리는 말이 하나 있다. “스크린도어가 열립니다, ...가 닫힙니다.” 간단하고 알아듣기 쉬운 말이 있을 텐데 뭔 말인지도 모를 영어를 사용할까 궁금했다. “문이 열립니다, 닫힙니다”라고 하면 못 알아 들을까봐 그런지 의아했다.

알고 보니 국토해양부령 ‘도시철도건설규칙’에 ‘스크린도어’라고 못 박고 있어 도시철도공사가 딴 단어를 사용하지 못하고 있단다. 규정을 뒤져보니 안전시설로 ‘층하차용 출입문설비’(이하 스크린도어) 또는 ‘안전펜스’라고 규정하고 있다.
 
‘안전문’은 한자어여서 안 된다고?
 
이런 고약한 경우가 있나. 규칙이 제정될 즈음 국립국어원이 ‘스크린도어’가 이상하다며 여론조사까지 벌였던 적이 있단다. 살피문, 차단문, 울타리문, 안전문, 안전담, 안전울 등을 제시하고 선택하도록 했는데, ‘안전문’이 다수여서 이를 건의했지만 무시됐던 것.

▲ '오른쪽 걷기'라는 좋은 우리말을 두고 '우측보행'이라고 굳이 쓰는 관료주의는 어디서 오는가?     © 최방식 기자

 
그런데도 국립국어원이 여태까지 가만히 있었던 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최근에 와서 한 시민단체가 공문을 보내니 도시철도공사가 그런 사실을 밝혔다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해명도 재밌다. ‘안전문’을 쓰는 게 어떠냐고 제안하자, 한자어여서 안 된다고 했다나.

스크린도어는 한자어가 아니어서 사용하는 것인가? 이 정권 출범을 준비하던 시설 ‘아린쥐’라고 떠들며 말썽을 일으키다 사라진 이들이 생각나 떨떠름해진다. 하여튼 전철을 타고 내릴 때마다 들려오는 정체불명의 그 소리 좀 안 들었으면 좋겠다.

우리 생활 속 외래어 남용이 도를 넘어선 느낌이다. 한글문화연대라는 한 시민단체가 며칠 전 광화문역에서 ‘우리말이 아파요’ 전시회를 열었는데, 그 실태를 잘 보여준다. '그린푸드존(식품안전보호구역)', '스모크프리존'(금연구역), '플라워카펫', '태그' 등...

이 단체는 행정기관의 외래어 남발을 꼬집었다. ‘Dynamic BUSAN’, ‘Hi Seoul’ 처럼 아예 표기까지 영어로 한 사례부터, 대전시 유성구 ‘테크노동’이라는 행정동명 사용까지. 학원이름인 ‘수학클리닉센터’, 사찰 견학행사인 ‘템플스테이’도 우리말오염 사례로 꼽혔다.
 
그린푸드존·플라워카펫·테크노동...
 
꼭 남일 만은 아니지만 나를 포함해 모두가 반성할 때인 건만은 분명해 보인다. 좋은 우리말을 두고 왜 자꾸 귀와 입이 거북하고 힘든 말글을 사용하는지 그저 안타까운 마음뿐이다. 그러고 보니 오랜 세월 논란거리였던 단어 하나가 떠오른다. 그렇다. ‘사대주의’다.

이 단어는 일제가 강점기시절 우리 민족성을 폄하하려고 만들어냈다고 한다. 식민지배를 변명(정당화)하려고 ‘반도적 성격’ 운운하며 우리를 과거엔 한족과 몽골족을 섬겼고 이젠 일본족을 섬기는 줏대 없는 민족이라고 욕보였다. 그게 ‘식민사학’으로 전해졌고 ‘우리는 안 돼’ 식 자학사관으로 오염된 게 사실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대중국 외교에서 동원됐던 ‘사대’(事大)를 감출 수는 없다. 송·요, 명·청 등 중국 황실이 바뀔 때마다 변방의 작은 나라에서 겪어야 했을 외교·군사적 고통은 짐작하고 남는다. 그 때마다 핏줄을 나눈 이웃 북방족을 오랑캐라 욕했던 오욕의 역사까지 사라진 건 아니다. 오죽했으면 신채호 선생 같은 이는 ‘낭가사상’(郎家思想)을 대안으로 얘기했을까.

▲ 한글문화연대라가 지난 5일부터 사흘간 광화문역에서 ‘우리말이 아파요’ 전시회를 열었다. '그린푸드존(식품안전보호구역)', '스모크프리존'(금연구역), '플라워카펫', '태그' 등 한글오염실태를 고발했다.   ©인터넷저널

 
‘사대주의’라는 말을 사용하기가 좀 그렇지만, 21세기 들어서는 동쪽의 강대국인 미국(아류 일본)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이들이 있는 모양이다. 저 혼자라면 누굴 섬기든 어찌 살든 내 알바 아니지만 지도자라면(이유야 어떻든) 사정이 좀 달라진다.

민족주의나 국수주의를 이야기 하는 게 아니다. 미국, 일본, 중국, 유럽 등과 친하게 지내는 국제주의 시절이니까. 미국 물 한 번 먹었다고 미국밖에 모르는 이, 이를 남에게 강요하는 이를 문제 삼는 것이다. 이런 이들이 과거 친일(지금은 친일 그 자체가 문제될게 없지만, 과거엔 피압박 자기민족을 배신했던) 지식인을 어찌 나무랄 수 있을까?
 
“관료·보수언론, 21세기형 배신자”
 
일제 강점기 땐 제 민족과 나라를 배반했다가 들통날까봐 친미로 변신하고 반공투사로 ‘경력세탁’을 한 이들. 분명히 말하지만 이들은 보수가 아니다. 그냥 변신의 귀재들일 뿐이다. 이들이야말로 일제가 우리에게 그토록 각인시키려 했던 바로 그 '사대주의자'인 것이다.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지긴 했으나, 매사가 미국식이고, 미국식 문화와 잣대를 들고서 우리 문화를 꺾거나 멍들게 하려는 이들이 있다면 그냥 두고 볼 수는 없다. 호혜·평등·친선의 국제주의(인류보편)적 문화교류를 넘어선 것이라면 이건 분명 21세기형 배신인 거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만들어 백성에게 권장할 때 ‘저질’이라 비난하고 명(明)의 분노를 사서는 안 된다고 거들먹거렸던 유학(성리학)자들처럼, 이 땅의 모든 문화를 맹목적으로 미국식(또는 일본식)으로 바꾸려드는 정치·행정 관료와 학자들이 있다면 이들 역시 역사적 심판을 면치 못 할 것이다.

유식이나 유능의 잣대가 영어인 사회. ‘아린쥐’를 못하면 미국은커녕 강남도 못가는 정말이지 웃기는 나라에 살고 있다. 그 책임의 큰 몫은 당연히 언론의 것. 세종을 질타했던 유학관료, 매국·매족을 하고서도 그런 적 없다고 잡아떼고 이젠 미국식 아니면 능력 없다거나 촌스럽다고 하는 관료나 언론은 하등에 다를 게 없다. 훈민정음 반포 563돌에 드는 생각 하나. 기자질 하는 게 이렇게 창피한 적도 드물다.
평화를 사랑하는 최방식 기자의 길거리통신. 광장에서 쏘는 현장 보도. 그리고 가슴 따뜻한 시선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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