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린쥐, 스크린도어, 그리고 세종대왕[길거리통신] “유식·유능 잣대가 영어인 웃기는 사회, 기자질 창피해”출근길에 기분 좋은 글이 눈에 들어왔다. 7호선 한 역사인데 며칠 전까지만 해도 ‘우측보행’이라고 써놨더니 ‘오른쪽 걷기’라고 고치고 괄호 안에 전에 썼던 음을 병기해 넣었다. 그 역만 그런 가 궁금했는데, 5~8호선이 전부 바뀌었다. 서울도시철도공사를 칭찬해줘야 할 성 싶다.
말 나온 김에 하나 더 해두자. 전철을 탈 때마다 귀에 거슬리는 말이 하나 있다. “스크린도어가 열립니다, ...가 닫힙니다.” 간단하고 알아듣기 쉬운 말이 있을 텐데 뭔 말인지도 모를 영어를 사용할까 궁금했다. “문이 열립니다, 닫힙니다”라고 하면 못 알아 들을까봐 그런지 의아했다. 알고 보니 국토해양부령 ‘도시철도건설규칙’에 ‘스크린도어’라고 못 박고 있어 도시철도공사가 딴 단어를 사용하지 못하고 있단다. 규정을 뒤져보니 안전시설로 ‘층하차용 출입문설비’(이하 스크린도어) 또는 ‘안전펜스’라고 규정하고 있다. ‘안전문’은 한자어여서 안 된다고? 이런 고약한 경우가 있나. 규칙이 제정될 즈음 국립국어원이 ‘스크린도어’가 이상하다며 여론조사까지 벌였던 적이 있단다. 살피문, 차단문, 울타리문, 안전문, 안전담, 안전울 등을 제시하고 선택하도록 했는데, ‘안전문’이 다수여서 이를 건의했지만 무시됐던 것.
그런데도 국립국어원이 여태까지 가만히 있었던 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최근에 와서 한 시민단체가 공문을 보내니 도시철도공사가 그런 사실을 밝혔다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해명도 재밌다. ‘안전문’을 쓰는 게 어떠냐고 제안하자, 한자어여서 안 된다고 했다나. 스크린도어는 한자어가 아니어서 사용하는 것인가? 이 정권 출범을 준비하던 시설 ‘아린쥐’라고 떠들며 말썽을 일으키다 사라진 이들이 생각나 떨떠름해진다. 하여튼 전철을 타고 내릴 때마다 들려오는 정체불명의 그 소리 좀 안 들었으면 좋겠다. 우리 생활 속 외래어 남용이 도를 넘어선 느낌이다. 한글문화연대라는 한 시민단체가 며칠 전 광화문역에서 ‘우리말이 아파요’ 전시회를 열었는데, 그 실태를 잘 보여준다. '그린푸드존(식품안전보호구역)', '스모크프리존'(금연구역), '플라워카펫', '태그' 등... 이 단체는 행정기관의 외래어 남발을 꼬집었다. ‘Dynamic BUSAN’, ‘Hi Seoul’ 처럼 아예 표기까지 영어로 한 사례부터, 대전시 유성구 ‘테크노동’이라는 행정동명 사용까지. 학원이름인 ‘수학클리닉센터’, 사찰 견학행사인 ‘템플스테이’도 우리말오염 사례로 꼽혔다. 그린푸드존·플라워카펫·테크노동... 꼭 남일 만은 아니지만 나를 포함해 모두가 반성할 때인 건만은 분명해 보인다. 좋은 우리말을 두고 왜 자꾸 귀와 입이 거북하고 힘든 말글을 사용하는지 그저 안타까운 마음뿐이다. 그러고 보니 오랜 세월 논란거리였던 단어 하나가 떠오른다. 그렇다. ‘사대주의’다. 이 단어는 일제가 강점기시절 우리 민족성을 폄하하려고 만들어냈다고 한다. 식민지배를 변명(정당화)하려고 ‘반도적 성격’ 운운하며 우리를 과거엔 한족과 몽골족을 섬겼고 이젠 일본족을 섬기는 줏대 없는 민족이라고 욕보였다. 그게 ‘식민사학’으로 전해졌고 ‘우리는 안 돼’ 식 자학사관으로 오염된 게 사실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대중국 외교에서 동원됐던 ‘사대’(事大)를 감출 수는 없다. 송·요, 명·청 등 중국 황실이 바뀔 때마다 변방의 작은 나라에서 겪어야 했을 외교·군사적 고통은 짐작하고 남는다. 그 때마다 핏줄을 나눈 이웃 북방족을 오랑캐라 욕했던 오욕의 역사까지 사라진 건 아니다. 오죽했으면 신채호 선생 같은 이는 ‘낭가사상’(郎家思想)을 대안으로 얘기했을까.
‘사대주의’라는 말을 사용하기가 좀 그렇지만, 21세기 들어서는 동쪽의 강대국인 미국(아류 일본)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이들이 있는 모양이다. 저 혼자라면 누굴 섬기든 어찌 살든 내 알바 아니지만 지도자라면(이유야 어떻든) 사정이 좀 달라진다. 민족주의나 국수주의를 이야기 하는 게 아니다. 미국, 일본, 중국, 유럽 등과 친하게 지내는 국제주의 시절이니까. 미국 물 한 번 먹었다고 미국밖에 모르는 이, 이를 남에게 강요하는 이를 문제 삼는 것이다. 이런 이들이 과거 친일(지금은 친일 그 자체가 문제될게 없지만, 과거엔 피압박 자기민족을 배신했던) 지식인을 어찌 나무랄 수 있을까? “관료·보수언론, 21세기형 배신자” 일제 강점기 땐 제 민족과 나라를 배반했다가 들통날까봐 친미로 변신하고 반공투사로 ‘경력세탁’을 한 이들. 분명히 말하지만 이들은 보수가 아니다. 그냥 변신의 귀재들일 뿐이다. 이들이야말로 일제가 우리에게 그토록 각인시키려 했던 바로 그 '사대주의자'인 것이다.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지긴 했으나, 매사가 미국식이고, 미국식 문화와 잣대를 들고서 우리 문화를 꺾거나 멍들게 하려는 이들이 있다면 그냥 두고 볼 수는 없다. 호혜·평등·친선의 국제주의(인류보편)적 문화교류를 넘어선 것이라면 이건 분명 21세기형 배신인 거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만들어 백성에게 권장할 때 ‘저질’이라 비난하고 명(明)의 분노를 사서는 안 된다고 거들먹거렸던 유학(성리학)자들처럼, 이 땅의 모든 문화를 맹목적으로 미국식(또는 일본식)으로 바꾸려드는 정치·행정 관료와 학자들이 있다면 이들 역시 역사적 심판을 면치 못 할 것이다. 유식이나 유능의 잣대가 영어인 사회. ‘아린쥐’를 못하면 미국은커녕 강남도 못가는 정말이지 웃기는 나라에 살고 있다. 그 책임의 큰 몫은 당연히 언론의 것. 세종을 질타했던 유학관료, 매국·매족을 하고서도 그런 적 없다고 잡아떼고 이젠 미국식 아니면 능력 없다거나 촌스럽다고 하는 관료나 언론은 하등에 다를 게 없다. 훈민정음 반포 563돌에 드는 생각 하나. 기자질 하는 게 이렇게 창피한 적도 드물다. <저작권자 ⓒ 인터넷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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