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앞둔 가을산은 여행자의 철학책

[길거리통신] 시련·인고의 세월 이기고 ‘무문관’ 나설 수도자되라는...

최방식 기자 | 기사입력 2009/10/17 [10:20]

‘이별’ 앞둔 가을산은 여행자의 철학책

[길거리통신] 시련·인고의 세월 이기고 ‘무문관’ 나설 수도자되라는...

최방식 기자 | 입력 : 2009/10/17 [10:20]
다시 길을 나섭니다. 늘 다녔건만 그 길이 아닙니다. 그 길 어딘가에서 우리는 만나고 헤어집니다. 세상만사가 다 그렇듯이요. 의당, 소중하고 새로울 밖에요. 행여, 처음 들어선 길은 행운입니다. 새 인연을 만드니까요. 하여, 낯선 길만 고집한다고요? 엉터리입니다.

토요일이면 등짐을 지고 집을 나서는 까닭입니다. 특별한 소식이 없으면 청량산으로 향합니다. 햇볕이 간절할 땐 버스를 탑니다. 그늘이 그리울 땐 전철로 가고요. 물통 하나, 카메라 하나 짊어지고. 은행나무 구린 냄새는 잠깐입니다. 지나치는 것이기에. 것도 가을에만.

▲늘 다녔지만 같은 길이 아닙니다. 그 길 어딘가에서 우리는 만나고 헤어집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보내고 맞이 하듯이요... ©최방식 기자

▲ 길을 나서면 언제나 여행자를 안내하는 게 있습니다. 어디쯤인가 다리가 아파, 목이 마려워 잠시 앉아 고개를 들면 미소짓는 파란 하늘입니다.     © 최방식 기자

▲그 길엔 그늘이 져 있습니다. 햇볕이 드문 드문 보이는 그런... 김지하 선생은'흰그늘'이라고 부른다는 군요. 볕도 아니면서 그늘도 아닌.   © 최방식 기자


창가 휴대폰을 든 더벅머리 청년 손가락은 정말 달인입니다. 이어폰 낀 단발머리 여중생은 부끄럼이 없습니다. 침이 튀는 줄도 모르고 수다 삼매경에 빠진 아줌마들은 신명 수준. 어깨가 축 처진 꼬마는 토요일에도 학원엘 다니는 모양입니다. 가방 가득 엄마·아빠를 짊어지고서요.
 
“낯선 길만 고집한다고요?”
 
문득 종점입니다. 뚜벅이 산행을 시작하는 데지요. 내려올 때 들를 주막집을 봐두는 건 돌아오려는 자의 예의죠. 오르기도 전에 막걸리 한 잔이 간절할 때도 있습니다. ‘이쪽’이 신날 때가 많거든요. ‘저쪽’의 그늘과 고독에 비하면요. 삼수갑산 길을 가는 것도 아니니까요.

하지만 여행자는 저쪽 여정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쌓고 감추는 이쪽을 잠시 버려도 되니까요. 저쪽으로 들어서면 침잠했던 자아가 일어섭니다. 몸이 낯설어지기 시작하죠. 타자를 버리고 깊고 깊은 그늘 속으로 빠져들 준비를 시작하는 거죠. 그냥 쭉 가면 됩니다.

▲산 속 그 길에 들어서면 침잠했던 자아가 일어섭니다. 몸이 낯설어지기 시작하죠. 타자를 버리고 깊고 깊은 그늘 속으로 빠져들 준비를 시작하는 거죠.     © 최방식 기자

▲산은 눈치도 빠릅니다. 벌써 이별을 눈치 챈 것이지요. 그 '아름다운 이별' 끝에 생명이 기다리고 있음을 아니까요.    © 최방식 기자

▲밝은 길고 그늘진 길. 굽이 굽이 가파른 길은 늘 갈라서지만 망설일 필요는 없습니다. 갈라서지만 헤어지는 게 아니니까요.     © 최방식 기자


산은 눈치도 빠릅니다. 이별을 알아차린 것입니다. 매미 울음이 이젠 아련합니다. 햇볕은 따갑고요. 너무 아파하지 말라는 예고인 것이지요. 벌써, 헤어짐이 ‘아름다운 인연’이라고 다독이는 것이지요. 새 생명을 잉태하려면... 멋모르는 까치만 요란하게 그저 울어댑니다.

길은 갈라집니다. 밝은 길과 그늘 진 길. 반듯한 길과 굽은 길. 가파른 길과 평탄한 길, 북적이는 길과 한가한 길. 마주할 때마다 고민에 빠지지만 사실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 둘은 딴 길이 아니거든요. 다 이어져있으니까요. 알 턱이 없으니 망설이는 거지요.

길이라 하면 길이 아니고, 있다 하면 없다는 노자(老子). 사물을 제 눈으로 봐야 곧이듣는 범부에겐 그러니까 그의 가르침이 제격인 겝니다. 닫으면 딴 세상이지만 열면 하나라는 데리다의 ‘문’이야기까지 가면 정말 얼어붙는 거지요. 현자와 철학이 새삼스러워지는 땝니다.

▲가을이 못내 아쉬운 성벽 여장 곁에 핀 코스모스.     © 최방식 기자

▲구절초도 마지막 햇볕을 즐깁니다.     © 최방식 기자
 
▲ 가을은 뭇 생명을 다독입니다. 자신을 버리면 새 삶이 잉태한다는...      © 최방식 기자


‘헤어짐’이 아름다운 인연
 
생명사상을 말했지요. ‘그늘의 미학’을 설파한 김지하 선생 말이 절실하더이다. 제아무리 멋지게 포장해도 “그늘이 없어” 그 한 마디면 꽝이라고 했다지요? 찬란함 저편 어둠(그늘)과 참담함을 모르면 빛이 나질 않는다지요. ‘흰그늘’이라는 신조어까지 써가면서요.

여행자가 길 위에 서는 까닭은 분명합니다. ‘저쪽’을 알고 싶어서죠. 그리하면 ‘이쪽’이 더 잘 보이니까요. 이 길이 저 길, 그리고 그 길로 이어졌음을 깨닫는 것이지요. 길 아닌 곳을 보면서요. 길 밖에서 길을 보듯이. 밝은 곳을 보면서 그늘진 곳을 이해하듯이.

가을 산은 빛과 그늘의 천국입니다. 볕이 아직 더 필요한 생명은 그러니 난리법석입니다. 그늘진 뭇 생명은 어둠을 준비하느라 바쁘고요. 이쯤 카메라 렌즈가 쓸모 있으려나 싶어 꺼내보지만 무용지물입니다. 범부가 눈을 씻고 들어다 봐도 ‘존재’를 보지 못 하 듯이요.

▲ 나무 속에 곰이 자라고 있었나요? 가을이 그린 예쁜 그림입니다. 나뭇속도 훌륭한 캔버스입니다.   © 최방식 기자

▲가을 단풍이 성급합니다. 하지만 햇볕이 줄어들면 이 예쁜 나뭇잎들은 긴 동면을 준비한다지요?     © 최방식 기자

▲ 청량산 맨 꼭대기 수어장대는 철에 따라 제 모습을 달리합니다. 가을엔 울긋불긋한 모습으로...     © 최방식 기자


길을 나서는 건 그 때문입니다. 빛과 어둠, 그리고 어둠속 그 무엇을 담지 못하는 렌즈를 믿을 수 없으니까요. 빛 속에 빨려들고, 어둠 속 나락으로 곤두박질치는 건 그러니 운명인 셈입니다. 빛과 어둠의 저편을 감지하려는 것일 테니까요. 발품이 깨달음입니다.

아름다움과 추함, 빛과 어둠의 조화는 이제 세상을 긴 어둠의 터널로 끌어들입니다. 찬란한 그 가치를 확인시켜주려는 것이지요. 양자의 고마움을 보충대리하려고요. 시련과 인고의 세월을 지내고 ‘무문관’을 나서는 수도자가 되라는 것이지요.
 
‘데리다의 문’ 앞에선 수도자
 
문고리를 굳게 걸어 잠그고 긴 동안거의 그늘 속으로 침잠하는 자연은 아름답습니다. 낯선 길 어딘가에서 무언가를 깨달고 ‘아!’ 감탄사를 낼 당신은 ‘현자의 돌’을 거머쥔 연금술사가 되는 겁니다. 지났던 그 길. 반복이 아니었음을 알았으면 기껏 ‘엉터리’신세를 면하는 겁니다.

▲시련과 인고의 세월을 지내면 ‘무문관’을 나서는 수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긴 어둠을 지나 찬란한 햇볕을 마주할 수 있을테니까요.     © 최방식 기자

▲성곽에 곱게 물든 당쟁이 덩굴은 닫으면 딴 세상이지만 열리면 하나인 '데리다의 문' 곁에서 잠시 사유의 시간을 즐깁니다. 이 가을 문턱에...    © 최방식 기자
▲긴 인고의 시절을 견디고 다시 여행을 떠날 때면 저 희미한 석양볕은 다시 찬란한 희망으로 떠오를 겁니다.       © 최방식 기자
평화를 사랑하는 최방식 기자의 길거리통신. 광장에서 쏘는 현장 보도. 그리고 가슴 따뜻한 시선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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