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널리즘의 무덤' 돼버린 방송리포트

진실을 향한 탐사보도를 포기하고 국가·자본의 정보만 전달...

전규찬 교수 | 기사입력 2010/01/22 [16:10]

'저널리즘의 무덤' 돼버린 방송리포트

진실을 향한 탐사보도를 포기하고 국가·자본의 정보만 전달...

전규찬 교수 | 입력 : 2010/01/22 [16:10]
“시민들에게 민주적 자치에 필요한 정보나 의견을 전달하는 저널리즘의 본질이 바뀐 것은 아니다. 저널리즘의 기본 원칙들은 다매체·다채널 시대인 현대에 들어와 오히려 더 강화되고 있다. 전달하는 매체가, 내용을 제작하는 방법이 다르다고 해서, 저널리즘의 기본 원칙이나 의무가 달라질 수 없다. 시민들에 대한 충성과 면밀한 사실 확인, 진실 추구라는 저널리즘의 의무가 기자 리포트와 PD의 탐사 프로그램에서 다르게 적용될 수 없고, 또 그렇게 돼서도 안 된다.”

지난 학기 타 대학 언론대학원에 출강했을 때, 한 수강생이 제출한 기말과제는 이러한 문제제기로 시작하고 있다. ‘저널리즘은 하나다’라는 제목을 단 이 리포트의 주인공은 뻔한 원론만 반복적으로 읊조리는 방송학자가 아니요, 당연한 원칙을 개진하고 마땅한 기대를 표식하는 의식을 갖춘 시청자 대중도 아니다. 상당 수준의 저널리즘 이상론을 고수하는 이 글의 저자는 지상파 방송사의 간부급 기자다. 그런 그가 ‘민주적 자치’에 복무해야 할 ‘저널리즘의 본질’, ‘진실 추구라는 저널리즘의 의무’를 주장하고 있다. 나아가 ‘의무’와 ‘본질’에서 기자와 PD의 저널리즘 동일성이라는 자기 소신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저널리즘과 리포팅의 차이

▲ 워터게이트 사건을 다룬 영화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1976) 포스터.    
이런 태도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오랫동안의 현장 체험에서 확립되었을 것이 분명한 그의 이론은 평상시 본인이 강의나 논문를 통해 주장해오던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발터 베냐민을 따라 “현재 활동 중인 공동체들에 영향을 미치기에 훨씬 더 적합”하며, 순간순간을 능동적으로 감당할 ‘기민한 언어’ 형식으로 본 인터넷 잡글도 그러한 철학에 기초하고 있다. 간단히 생각을 정리하면, PD 또는 기자라는 수식어와 상관없이 저널리즘은 오직 진실 추구의 과정적 실천 노력으로서 리포팅과 구별된다. 진실 복무에 태만한 기사·보도와 저널리즘은 본질적으로 전혀 무관하다.

그렇기 때문에 ‘기자 저널리즘’의 반대 개념으로 ‘PD 저널리즘’을 주창하거나, ‘PD 저널리즘’의 이념적 정파성을 들어 ‘기자 저널리즘’의 균형적 객관주의를 내세우는 논리를 수긍할 수 없다. PD가 만들건 아니면 보도국에서 제작했건, 진실을 탐사하는 실천으로서 저널리즘이라는 이름 하나로 충분하다. 자발적 현실 취재 과정으로서의 저널리즘은 정보원이 제공하는 표피적 사실이나 확인조차 되지 않은 정보를 단순 릴레이하는 리포팅의 반대말로서 성립된다. 저널리즘은 주로 심층의 진실 발굴에 주목하고, 리포팅은 오직 표피의 사실 전달에 주력한다.

알랭 바디우의 정치·윤리학적 표현을 빌리자면, 저널리즘은 일종의 ‘진실 과정’(truth process)으로서 ‘선한 것’이 된다. 반대로 리포팅은 표면에서 얼쩡거리면서 표피를 강화 처리하는 결과를 빚고 사실을 진실로 오인토록 하는 신화 효과를 냄으로써 정치적으로 ‘악한 것’이 된다. 앞의 방송기자 이야기도 이같은 선한 저널리즘과 악한 리포팅의 변별을 전제하고 있는 듯하다. 저널리즘의 원래 의무에 성실해야 할 저널리스트의 윤리를 새삼 강조한 것이리라. 그런데 왜 이런 당위적이고 원칙을 확인시켜주는 현장의 이야기가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나름의 의미를 지니는 앞의 글이 재미없는 것은, 그것이 오늘날 방송 보도의 현실을 생략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칙에 기초해 방송 PD·기자의 정치적 수행성을 비판적으로 따져보거나, 방송 보도의 사회적 가치를 면밀히 평가하는 작업을 게을리했기 때문이다. 미셸 푸코가 말하는 철학의 출발점인 문제시화하는 노력을 현실 속 방송 보도의 실재계에 적용시켜보자. 물어보자. 한국 텔레비전 방송 보도는 진실의 저널리즘, 즉 선한 저널리즘의 문화에 과연 해당하는가? 한국 방송기자들은 리포터라는 단순 기능인으로서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저널리스트라는 지적 정치인으로 존재하는가?
 
지적 정치인으로서 저널리스트

방송 PD·기자의 ‘정치적 수행성’이란 진실 발굴과 그에 기초한 이성의 공적 사용을 통한 공론(장) 생산 능력을 가리킨다. 신자유·신보수주의 자본국가가 지향하는 억압적 치안 상태에 맞선 자유로운 언론, 민주적 여론 매개자로서의 대의적 역할을 뜻한다. 따라서 방송 PD·기자의 정치성이 높아질수록 방송 보도의 사회적 가치, 즉 인민 대중의 일반적 교통(communications) 가능성도 자연스럽게 확보될 수 있다. 반대로 방송 기자·PD가 정치적 수행에 실패하면, 시민 다수의 교제 능력과 그에 기초한 민주적 사회 규제력도 현저하게 떨어지게 된다.

리포팅이 악하고 저널리즘이 선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권력이 제공하는 사실을 일방적으로 확대재생산하는 리포팅이 정치적으로 위험하고, 권력에 반해 독자적으로 진실을 탐사·취재하는 저널리즘이 사회적으로 유리한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악한 리포팅은 합리적 대중교통을 결정적으로 방해하고, 궁극적으로 교통 대중의 정치적 민주주의에 대한 기대를 구조적으로 억압한다. 리포팅은 흔히 말하는 것과 달리 ‘민주주의=정치=사회’에 내려진 일종의 차단기이며, 심지어 권력의 홍보·선전 의지와 교묘하게 결탁함으로써 정치·사회를 불능 상태에 빠뜨린다.

2010년 들어서도 아무런 변화 없이 지속되는 한국 방송 보도의 상태는 정확하게 저널리즘이 아닌, 리포팅이다. 사회 구성 가능성에 반하는 저급한 리포팅, 탈정치라기보다는 반정치적 행태의 못된 리포팅이다. 국가 기간 방송 한국방송의 잘난 기자들이 만드는, 한때는 탐사 저널리즘의 전범으로 평가받기도 했던 프로그램 <쌈>의 타락을 보라. 누구나 카메라를 들고 마이크를 잡으면 할 수 있는, 동어반복적이고 의미 없는 이야기를 괜히 젠체하며 늘어놓고 있다. 부족한 심층성을 매끈한 영상미로 대체하려 하나, 정치력을 발휘하고 사회성을 확보하기에 한마디로 함량 미달이다.

그렇다고 PD들이 만드는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진실을 제대로 파헤친 경우가 요즘 들어 있던가? 저널리즘의 기억은 국영과 사영, 공영 방송을 가리지 않고 까마득하기만 하다. 방송 저널리즘은 반짝 한때의 옛이야기이며, 오늘날의 스토리가 절대 아니다. 지금은 리포팅이 대세다. 문화방송도 이런 경향성에서 예외가 아니다. <PD수첩>의 몇몇 선수가 개별적으로 분발하고 있지만, 구조화된 실천으로서 저널리즘은 막 내린 상태다. 촛불 대중이 정치공론의 대중매개 공간으로 보호·지지하던 문화방송에서도 저널리스트들은 침묵과 자기 검열의 망명지로 피신했다.
 
한국의 방송, 탈정치 아닌 반정치

요컨대 한국 텔레비전은 총체적으로 리포터들의 독차지다. 이들이 양산하는 불량한 리포팅의 닫힌 사회다. 우선 권력 파견자들의 위로부터의 통제 단속 탓이 크고, 한편으로는 일부가 자발적으로 코드를 같이하기 때문일 수 있다. ‘어쩔 수 없다’는 집단적 무력감이나 ‘괜히 잘못되면 나만 다친다’는 이기적 기회주의가 기자·PD 집단 내부의 망탈리테로 팽배한 것 같기도 하다. 흔히 말하는 강남 출신 ‘스카이’ 연줄의 계급적 한계가 자연스레 내용물로 표출된 것일까? 아무튼 이런저런 복잡한 요인들의 작용 탓이겠지만, 2010년 지금의 방송 보도는 명백하게 저널리즘 영점 상태다.

이런 균질적 리포팅의 체계는, 말했듯이 권력의 홍보, 정권의 선전 의지와 정확하게 맞아떨어진다. 사실 국가·자본의 이중 권력 입장에서 볼 때, 자신이 편의적으로 제공한 정보를 단순 가공 전달하는 기자만큼 고마운 사람이 없다. 그런 기능인이 많을수록 자본의 홍보 효과가 높아지고 국가의 선전 욕망이 은폐된다. 리포팅과 홍보, 즉 선전의 차이는 거의 없다. 리포터가 의도치 않고도 자본을 위한 홍보 인력으로 전락하거나 국가를 위한 선전 일꾼이 되는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리포팅은 구조적으로 권력선전·선전권력의 활동과 연동된다. 방송 보도가 한국 사회의 네오파시즘 탄생에 일정 책임을 져야 하는 이유다.

최근의 몇몇 경우만 들어보자. 문화방송의 <뉴스데스크>는 아랍에미리트 원자력 발전소 건설 사업권 수주와 관련해 얼마나 많은 정권 홍보 기사를 쏟아냈던가? 정권의 조직화된 신화 창조적 선전 전략에 얼마나 능동적으로 일조했던가? 진실 탐사는커녕 사실 확인의 기본조차 포기하지 않았던가? 명백하게 국가 선전에 복무한 것 아닌가? “방송 보도도 사전에 짜인 각본처럼 움직였던 것으로 보인다”는 한 청와대 출입기자의 지적처럼, 문화방송도 정권의 선전 플레이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 선전 장치의 일부로서 성실히 기능했다. 왜 그러해야만 했는가? 앞으로는 또 어떨 것인가?

‘국익’이라는 환상이 방송 보도가 짊어져야 할 공통 이익, 즉 공익 판단의 기본 서비스를 무력화한 지 오래다. 한국방송 <9시 뉴스>가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의 사면·복권을 보도하는 방식이 딱 그러하다. ‘사회적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 수구 신문들이 봉사한다면, 한국방송 뉴스는 그렇게 제조된 여론에 기초한 재벌 총수의 ‘특별한 죄 사함’을 받아들여야 할 현실로 확정했다. 결국 자본과 국가가 원하는 현실을 사회 일반적인 현실로 만들어내는 채널로서 기능할 뿐이다. 전 국세청장과 연관된 권력 비리와 같은 진실을 파고들려는 용기는 한국방송이나 문화방송, YTN, SBS 어디에도 없다.

이것이 2010년 방송 보도의 진상이다. 한국 텔레비전에 저널리즘은 없다. 지식인으로서의 저널리스트도 없다. 전 사회를 관통하는 탄압 분위기, 마찬가지로 사회 전반적으로 팽배한 공포의 공통 감각, 그에 따른 낭패감과 무력감·보신주의 집단문화가 그 이유일 수 있겠다. 이 때문에 전적으로 기자를 탓하거나 PD를 욕할 수는 없다. 그래도 확실히 해둘 것은, 푸코가 말한, 권력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고 진실을 소개하려는 자유언론의 실천은 텔레비전에서 완전히 부재하다는 점이다. 파르헤지아(parrhesia)의 정치 윤리를 자임하기에 오늘날의 방송 기자·PD는 너무나 무력하다. 바로 이게 현실이다.
 
리포터를 그냥 리포터라 부르마


방송 보도에 관한 우리의 논의는 철저하게 현실적이어야 한다. 저널리즘 실패의 상을 리포팅 지배문화의 현실 속에서 구체적이고 성찰적으로 감시·고발해야 한다. <PD수첩>의 분투하는 소수를 보호해야 하지만, ‘PD 저널리즘’ 전반의 기능 정지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탐사 취재의 요소가 없다면, 아무리 PD들이 만들었더라도 기자의 구성물보다 나을 이유가 없다. 저질 리포팅으로 전락한 뉴스 프로그램에 저널리즘이라는 막중한 명예를 부여하는 것도 전혀 옳지 않다. 리포터를 그냥 리포터라고 호명해야 하며, 리포팅이 어떻게 선전권력·권력선전과 근친한지를 예의주시해야 한다.

지금은 그런 철저한 현실주의적 비판이 필요한 때다. 방송 저널리즘의 명백한 실패를 냉정하게 인식하는 것이다. 탄압하는 권력과 통제하는 정권을 비판하는 것과 동시에, 예외적인 방송 저널리스트들을 지지하는 것과 함께, 실패하고 있는 다수의 리포터와 이들의 리포팅을 확실하게 분별해내야 한다. 저널리즘과 리포팅의 대당적 문제 설정. 그러는 게 네오파시즘 선전 체제에 맞서 남은 정치의 시간, 사회적 공간을 지키는 데 더 도움이 된다. 저널리즘 영점 상태를 확인하고 그것이 얼마나 민주주의를 치명적으로 손상시켰는지 인식할 때, 그런 현실적 공통 감각에서 생산적 모색의 선이 맺어질 수 있지 않을까?

[위 글은 르몽드디플로마티크지(http://www.ilemonde.com/)와 한겨레21에 실린 내용으로 본지 편집인에게 보내온 이메일에서 발췌했습니다.]


 

전규찬교수는 위스콘신대 신문방송학 박사.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서 가르치면서 문화연대 미디어문화센터 소장, 공공미디어연구소 이사장을 맡고 있다. <한겨레>에 고정 칼럼을 기고했고, 지금은 <미디어스>에 글을 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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