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대 친환경 한옥건축, 삶 속 진보 아닐까요, 진흙속 연꽃처럼”여주양평 문화예술인들의 삶(16) 전현찬 대목“‘운명의 날 시계’에 따르면 지구가 멸망 90초 전이라고 해요. 핵위협과 온실가스가 주원인이고요. 짓고 부수기를 반복하며 건축폐기물과 온실가스를 토해내는 건축도 그 한가운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목재와 기와 주춧돌 등 모든 자재를 재활용하는 한옥을 장려해야 합니다.”
한옥을 지으며 진보를 고민하는 이가 있다. ‘여주양평 문화예술인들의 삶’ 열여섯 번 째 주인공 전현찬 대목(도편수·56)이 그 주인공. 곳과 때를 가리지 않고 쏟아지는 건축폐기물을 줄이면서 콘크리트·화학물질 폐해를 완화하고 이웃·자연과 소통하는 공동체문화를 확산하려면 한옥에 주목해야 한다는 목소리다.
그가 한옥을 권장하는 건 건축폐기물과 온실가스를 크게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기와집은 그 재료인 나무, 돌, 기와, 흙 등을 모두 재활용할 수 있다. 초가는 안 살면 그대로 자연으로 돌아간다. 골조인 목재를 재활용하면 탄소고정효과도 노릴 수 있다.
“나무 돌 기와 흙 모두 재활용 가능”
“요즘 주변을 보면 건축폐기물이 넘쳐납니다. 건축물을 짓고 부수기를 끊이지 않아서 그렇죠. 고속성장과 경제부흥 그 밑바탕에 건설경기가 있으니까요. 자원낭비에 온실가스 배출이 심각할 밖에요. 수백살의 고택·다리를 해체해 재사용하는 전통건축과 비교해보면 그 심각성을 뚜렷이 알 수 있지요.”
한옥을 내세우는 덴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지진에 잘 버티고 내구성 역시 뛰어나다는 건 알려져 있다. 콘크리트·화학제품(인테리어) 폐해(알레르기 등)도 거의 없다. 자연·이웃과 열린 구조다보니 소통이 자유스러운 점도 있다. 사라져가는 전통문화를 새롭게 부흥, 공동체문화를 세우는 것도 또 다른 가치.
“양옥과 비교해 좀 다른 점은 한옥에 처마가 있다는 거잖아요. 비, 바람, 햇볕은 가려주거든요. 건물의 내구성에 중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편의도 높이고요. 한옥 담장은 또 바람을 가두지요. 강풍이 불어도 한옥 마당이 고요한 건 그 때문이거든요. 비오는 날 처마 아래나 누마루에서 곡차 한 잔은 덤이지요.”
그가 특별히 한옥에 꽂힌 건 철학 때문이다. 조선시대 한옥을 보면 사치나 화려함이 이전보다 크게 줄은 게 고려 말 흥청망청했던 부패한 귀족사회의 몰락에서 얻은 반면교사로 그는 해석한다. 절제된 건축술, 미니멀의 미학이랄까.
“한옥은 인테리어가 필요 없지요. 나뭇결과 짜 맞춘 모습 그 자체가 예술이거든요. 규모가 크고 가공이 용이한 구조재는 소나무를 쓰지만, 창호나 가구·벽재 등은 문양과 색깔이 예쁜 가중나무나 괴목(느티나무)을 사용해요. 고운 결을 자랑하거든요.”
그의 말을 듣고 있자니, ‘연장을 탓하지 않는’ 목수 아닐까 싶다. 불교 경전모음인 ‘숫타니파타’(1장 3번째 경, 무소의 뿔의 경)에 기록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소설 영화로 친근한)는 경구가 떠오른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두려움 없이, 집착을 벗고, 휘둘리지 않고, 자기만의 길을 가는 발걸음이 그럴까.
절제의 미는 집 이름에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의 집 이름은 무일당(無逸堂). 늘 깨어 사색하고 부지런하자는 뜻. 한자로 ‘당호’(堂號)라 하는 데, 집 이름이나 그 집에 사는 사람을 말한다. 여유당(與猶堂, 다산 정약용이 머뭇거리고 두려워하는 자신의 처지를 투영해 지은 집 이름)이 대표적이다. 한국 집이름 편액 550점이 유네스코 아·태기록유산에 등재되기도 했다.
“재밌는 게, 한옥에선 반드시 집 이름을 편액에 써 붙이고 부르죠. 대게는 인생의 정점에 집을 짓거나 작품집 등을 내놓거든요. 그만의 철학을 담아서요. 그러니 집에 이름을 붙이는 건 존중한다는 뜻이죠. 자신과 동일시하는 문화이기도 하고요.”
한옥에 단점도 없잖다. 건축비가 많게는 두 배 가까이 드는 데, 산업화가 안 된 때문이다. 수요가 적어 목수·석수·미장·와공을 구하기 어렵고, 재료 또한 시공자가 일일이 재단해야 해서 그렇다. 에너지효율이 떨어지는 것도 문제. 패시브하우스처럼 과학·산업화한다면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
그가 왜 대목이 되고 진보를 꿈꿀까 궁금했는데, 시작은 꿈이었다. 부산의 동래역 앞 오두막에서 자랐다. 열차 짐을 싣고 내리는 고된 노동에 지친 아버지를 보며 건축을 꿈꿨다. 멋진 집을 지어 가족과 함께 안정적으로 살겠다는 희망.
“고교 때까지만 해도 건축가가 되겠다고 맘먹었죠. 대학갈 때 까먹었어요. 취업 잘된다는 말에 기계공학을 선택했죠. 취업은 소방 감리회사였으니, 건축쪽이었고요. 하지만 돈벌이가 별로였고 준공심사 등이 까다로워 어찌하면 애초 꿈을 찾아갈까 늘 고민했죠.”
그러던 중 IMF가 찾아왔고, 전화위복의 계기가 됐다. 때마침 전원주택, 서양식통나무집 등 바람이 일었고, 그는 주저 없이 회사를 때려치우고 민간 한옥학교에 들어갔다. 목수 기술을 전수받는 곳이었다.
“한옥 건축을 배우다보니 당연히 대목(집 목구조를 담당하는, 도편수(한옥 시공 총책임)라고도 부름)의 길로 나갔죠. 목수 3~5년이면 ‘먹잡이’(목재를 재단하는, 실은 이때부터 목수라 할 수 있음)를 하는 데, 일거리가 꽤 많았습니다. 그 때부터 한옥의 구조와 특성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죠.”
한옥 건축 바람을 타고 그는 꽤 많은 전통건축을 시공했다. 산청 동의보감촌 중앙의 ‘등황전’(2010년 80억원 규모), 동의보감촌 정문(동의문, 10억)과 후문(보감문, 10억), 밀양 영남루 하주 교체공사(2005년), 금강대학(천태종) 국제선원(2009년), 민간 한옥 건축 등이다.
그렇게 전국을 떠돌다 2004년 한국화가인 부인을 만났다. 안양의 한 사찰 목수 일을 할 때 법당 목 조각에 색 칠하는 아르바이트 학생이었다. 시골을 좋아하고 아이 낳지 않겠다는 등 바라는 바가 같았다고 했다. 화가인 건 그만의 바람이었고.
그가 양평에 사는 건 부인 때문이다. 결혼 전부터 지금의 계전리(개군면)에 터를 닦고 살았기에 거기 들어온 것이었다. 부인이 건축과 조경 공부를 최근 마쳐 한옥 전체(조경과 건축)를 설계하고 시공할 수 있게 된 것도 그에게는 또 하나의 희망이다.
학생·사회 운동을 해본 적 없던 그가 한옥을 건축하며 진보의 가치를 깨닫기 시작했다. 몇 해 전부터 진보당 후원회원으로 회비를 꼬박꼬박 내고 있다고 했다. ‘먹잡이’가 되고 느낀 게 많았다고 했다. 한옥을 건축하는 이들이 사회적약자이고, 이들을 위한 정책이나 정치가 없어 대변할 진보정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단다.
“한옥을 보면 대게 전통문화라고만 생각하잖아요. 근데 와서 보니 친환경적이었어요. 기후위기(변화)를 늦추는 데 중요하다는 판단도 들었고요. 쇠락하는 전통문화의 복고를 넘어, 한옥의 가치를 재해석하고 새 문화를 만들어 간다면 중요한 생활 속 진보겠더라고요.”
‘생어역수영’(生魚逆水泳)이란 말이 있다. 산 물고기는 물을 거슬러 오른다는 뜻인데, 장자의 ‘소요유’(逍遙遊)에 나온 말이다. 진보란 무언가 대단한 것만을 일컫는 건 아닐 터. 굴레를 깨고 나아가는, 살아있음을 입증하는 그 무엇 아닐까. 그 가치를 향유하고 마침내 자유를 향해 날아오를 수 있는. 그의 진보에 희망을 갖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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