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향기 따라, 주말 공원의 ‘작은 평화’ 만끽...

포토에세이 “팽팽한 직선타고 선홍빛 꽃잎의 뜨거운 입맞춤...”

최방식 기자 | 기사입력 2007/04/23 [20:01]

꽃향기 따라, 주말 공원의 ‘작은 평화’ 만끽...

포토에세이 “팽팽한 직선타고 선홍빛 꽃잎의 뜨거운 입맞춤...”

최방식 기자 | 입력 : 2007/04/23 [20:01]
지난 토요일 오랜만에 푹 쉬었습니다. 너무 오래 누워있어서 그런지 목이 뻐근할 지경입니다. 정오를 조금 넘긴 오후입니다. 아점을 먹으며 밖을 보니 아파트 화단에 연산홍이 활짝 피었습니다. 밥그릇을 비우자마자 디카를 들고 달려 나갔습니다. 꽃구경을 하러요. 늦깎이 봄맞이를 하러요. 살랑살랑 볼을 간지럽히는 꽃바람을 맞으면서요.

집을 나서자 연산홍이 제일 먼저 유혹합니다. 붉은 빛이 어쩜 이리도 선연할 수 있을까요? 진달래나 철쭉이 보랏빛을 내는데, 연산홍은 주홍입니다. 아니 선홍입니다. 일본이 고향인 이 꽃의 본래 이름은 영산홍인데 왜 연산홍으로 불리는 지 궁금합니다.

 “연산홍으로 불타는 가슴...”

 일설에 따르면, 연산군(왕의 남자에 나왔던 그 왕)이 이 꽃을 좋아해 창경궁에 1만그루 이상을 심게 했다고 합니다. 추측입니다만, 연산군이 이 꽃을 좋아한 건 어머니 폐비 윤씨가 사약을 받고 죽으며 아들에게 남긴 피토한 저고리 때문이 아닐까요? 제 눈엔 연산홍이 핏빛으로 보이거든요.


▲ 아파트 화단에 핀 연산홍. 본디 제 이름은 영산홍인데 선홍빛 꽃이 연산군의 어머니인 폐비 윤씨의 죽음을 연상케해 연산홍으로 불린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 최방식
▲ 아파트 화단 연산홍 곁에 곱게 피어난 꽃. 꼭 종이로 만들어놓은 조화같습니다. 꽃 이름은 잘 모르겠습니다.     © 최방식
▲ 올림픽공원 숲속 가득 흐드러지게 피어난 하얀꽃. 참으로 곱습니다.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요정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 합니다.     © 최방식

“...추락하는 눈빛 태우며/ 타오르는 뜨거운 숨결/ 붉게 이글거리는 가슴마다/...질식할 듯 숨죽이며/ 빼어드는 칼 빛 아래/ 팽팽한 직선타고/ 선홍빛 꽃잎의/ 뜨거운 입맞춤.” 인터넷을 뒤져보니 이런 시가 하나 있습니다. ‘연산홍 불타는 가슴’이라는 어느 시인의 꽃말입니다.

어린 시절 친구 한명과 말씨름을 한 적이 있습니다. 진달래를 두고 한 것인데요. 봄나들이를 가서 그랬을 겁니다. 꽃 색을 두고 주장이 엇갈렸습니다. 난 붉은 색이라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친구는 보랏빛이라고 했을 겁니다. 둘 다 바로 맞히지 못했습니다. 진달래색이 정답이거든요.

집이 올림픽공원 곁에 있어 주말이면 가끔 갔던 길입니다. 최근엔 몇 달간 나서지 못했던 길입니다. 제 안에 근심이 가득해 그랬을 겁니다. 운동이나 산보할 생각조차 안했거든요. 익숙한 길인데 참 낯설어 보입니다. 숲 속으로 난 작은 길엔 여기 저기 들꽃과 조경용 꽃들이 활짝 피었습니다.

▲ 조경용으로 심어놓은 홍매화인 모양입니다. 어느 건 빨갛게, 또 어느 건 하얗게 매혹의 꽃망울을 터뜨렸습니다. 벌 한마리가 유혹에 못이겨 날아들었군요.     © 최방식

▲ 공원 한 쪽 어딘가에 서있는 조각품. 작품이름이 '보르헤스를 기다리며'입니다. 아르헨티나 시인인지 아님 어느 인디언 추장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봄을 기다리는 내마음을 꼭 닮았습니다.     © 최방식

▲ 공원 안쪽 깊숙한 곳에 가니 나물케는 아낙들이 보입니다.  뭘 케는지 알아보고 싶었지만 그만뒀습니다. 쑥, 냉이, 아님 봄나물 뭔가를 케는 거겠죠?     © 최방식

홍매화, 진달래, 민들레, 그리고 이름도 모르는 수많은 꽃들이 반깁니다. 꽃다지 사이 한 조각품도 눈길을 끄는군요. ‘보르헤스를 기다리며’라는 작품입니다. 88년 설립당시 설치한 모양입니다. 이탈리아 작가 이름이 보입니다. 아르헨티나가 자랑하는 시인 보르헤스를 말하는 거겠죠? 인디언 추장일지도 모릅니다. 낡은 탁자 모양새가 꼭 봄을 기다려온 내 맘같이 생겼습니다.

공원 중앙부에 자리한 몽촌토성은 꽤 높은 구릉 위로 만들어졌는데, 그 둘레가 3킬로미터 쯤 됩니다. 그 안쪽은 숲과 잔디, 그리고 동산으로 꾸며져 있고, 바깥쪽은 각종 경기장이 있습니다. 토성위로 난 산책로에 오르니 진한 봄 향기가 확 풍겨옵니다. 사랑하는 여인 내음 꼭 그 것입니다.

 “낡은 탁자, 꼭 내 마음...”

 공원의 봄은 벌써 완연합니다. 뒤 늦게야 봄을 맞으러 나온 게 민망할 정돕니다. 꽃바람이 잿빛 옷섶을 파고드는군요. 땀이 나는 가 싶더니 어느 새 시원한 바람이 식혀줍니다. 저만치서 불어오는 진한 솔향기에 가슴이 확 트입니다. 아름드리 참나무들이 기지개를 펴는군요. 까치들도 제법 시끄럽습니다.


▲ 솔향이 나른한 정신을 깨웁니다. 산속 깊은 곳에서 느끼는 피톤치드의 그 향이랄까요? 봄의 정령이 아직 겨울잠에서 덜 깬 내 몸 세포를 모두 일으켜 세우는 것 같습니다.     © 최방식
▲ 참나무 숲이 제법 우거지기 시작합니다. 토끼, 꿩, 다람쥐가 많이 사는 곳입니다. 상수리 도토리 등 먹을게 많아서 그렇지요.     © 최방식
▲ 그 평화롭던 공원 하늘 위로 도시의 괴물들이 덮쳐옵니다. 타워크레인들이 공원의 작은평화를 무겁게 짖누르는 듯해 안타깝습니다.     © 최방식

토성을 반쯤 도니 초원입니다. 넓은 구릉을 다듬어 푸른 잔디밭을 만들었습니다. 그 한 가운데 유채밭이 훤하게 빛납니다. 노란 꽃들이 벌과 나비를 유혹하고 있군요. 상춘객들까지도 덩달아 신이 났습니다. 꽃밭 가득 엷은 셔츠 짧은 치마 연인들의 사랑노래가 묻어납니다.

“외로운 대지의 깃발/ 흩날리는 이녘의 땅/ 어둠살 뚫고 피어난/ 피에 젖은 유채꽃이여/ 검붉은 저녁 햇살에/ 꽃잎 시들었어도/ 살 흐르는 세월에/ 그 향기 더욱 진하리/ 아! 반역의 세월이여/ 아! 통곡의 세월이여/ 아 잠들지 않는 남도/ 한라산이여...” 전 유채꽃만 보면 오래전 불렀던 ‘잠들지 않는 남도’라는 노랫말이 떠오릅니다.

산책로의 중간쯤 구릉 한 가운데 높은 곳이 있습니다. 올림픽공원 정문 앞 송파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죠. 구릉 안쪽에선 잘 보이지 않던 도심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타워크레인으로 가득합니다. 정문 쪽에 무슨 행사가 있는지 천지가 진동할 정도의 굉음을 쏟아냅니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뒷골이 땡깁니다. 자랑하려는 욕심에 그러는 거겠죠?

▲ 솟대 셋이 봄바람을 즐기고 있습니다. 잿빛 가득한 서울 하늘 위에 파란물감을 풀어달라고 기원해봤습니다.     © 최방식
▲ 아, 유채꽃입니다. 반역의 땅, 통곡의 세월 오래오래 피어나던 그 남도의 꽃. 한마리 벌이 먼저 날아들었습니다.     © 최방식
▲ 노오란 유채꽃 저 넘어 사랑이 오고 있습니다. 보리밭 사이사이 생명이 움트니 물이 오르고 가슴이 뜁니다.     © 최방식

조금 지나니 좀 조용해집니다. 행사를 잠시 쉬는 걸까요? 아, 얼마나 좋은지. 새소리, 꼬마들의 재잘대는 소리, 나무와 꽃들이 수군거리는 소리, 물오른 대지가 터뜨리는 기지개소리, 그리고 공원 스피커가 전하는 조용한 고전음악까지 어우러져 천상의 화음을 연출합니다. 이 작은 평화를 제발 좀 지켜줬으면 좋겠습니다.

“작은 평화를 제발 지켜줘요”

공원을 막 돌아 나오는 길 옆 한 귀퉁이엔 막걸리판이 벌어졌습니다. 가슴 속 땀을 식혀줄 시원한 막걸리 한잔이 간절했지만 발길을 돌렸습니다. 술을 따라줄 친구가 없었거든요. 홀로 마신들 어떠하겠습니까만 참을 때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요. 아름다운 봄꽃들의 자태와 자연의 외침을 더 오래 가슴속에 담아두려고요. 앞으론 좀 더 자주 와야겠습니다.

▲ 마지막 벗꽃인 모양입니다. 아쉬움이 남았는지 한 그루 가득 피어올랐습니다. 어느 꽃이 더 예쁜지 고를 수가 없습니다. 저 아래 꽃눈이 내립니다.     © 최방식

▲ 화사한 봄날. 견공들도 나들이를 나왔습니다. 제 주인을 꼬드겨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 최방식
▲ 울타리 어디엔가 활짝 핀 철쭉입니다. 한참을 보고 있으니 정신이 혼미해지는 듯 합니다. 꽃잎 하나를 따 입에 물어봤습니다. 옛날 뒷동산 어디선가 봤던 그 애의 볼을 떠올리면서요.     © 최방식
  • 도배방지 이미지

주말 올림픽공원 꽃구경 관련기사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