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에간 내 아들 너무 억울하게 죽어"

의경입대 9개월만에 급성백혈병 사망... 구타 등 가혹행위 의혹

서울의소리 | 기사입력 2011/01/02 [17:54]

"군에간 내 아들 너무 억울하게 죽어"

의경입대 9개월만에 급성백혈병 사망... 구타 등 가혹행위 의혹

서울의소리 | 입력 : 2011/01/02 [17:54]


의경으로 군에 간지 9개월만에 급성백혈병을 얻고 6개월 투병을 하고 하늘에 간 내 아들아!

1. 의경으로 군대를 입대하게 된 이유
육군모병모집 싸이트에서 엄마와 아들은 아들이 다니는 화학공학생명공학부의 특징을 살릴 수 있는 곳에 신청을 했지만 무슨 일인지 번번히 자꾸 안되었습니다.

그렇게 입영날짜가 결정이 되지 않은채 3월이 되고 말았지요!

이젠 더 이상 육군으로 가게 되면 전역하고 복학하는데 시간이 많이 벌어져 있어서 본인 인생학업계획의 기본틀이 흔들려서 안된다고, 방법이 없을까 고심하다가 의경이 뭐하는 곳인지도 모르고 정말 바보같이 전역과 복학과 유학의 쉴틈없는 연계를 원하고 의경을 2009년 4월 2일 의경으로 군에 자원입대 하게 되었습니다.

우린 그길이 자식을 하늘에 보내게 되는 계기가 될줄 모른채 어리석게도...

유난히 엄마와 대화를 많이 하고 살갑게 구는 자식을 자주 못 본다는 그거 하나만 서러워 눈물을 흘리니 그애는 군에 가면서까지 내 등을 두드리면서 파이팅을 외치고 그넓은 훈련소광장으로 뛰어나갔지요. 가면서 그랬지요! “엄마 제가 인생의 깃발 꼭 꼽고 올게요!“

저희 아들의 성품은

천성이 사랑이 많으며 마음이 여리고 예의 바르고 윗분에게 순종적이며 성실한 도덕적인 성향이 짙은 소유자로 좋아하는 것에는 집념이 강하고, 하고자 하는 일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하는 그런 뚝심이 있는 녀석입니다.

군대 보내면서 오죽하면 엄마인 제가 적당히 해라 이렇게 말할 정도로 단체생활에서는 책임감이 투철한 아이였으며, 머리는 명석하고 총명하며, 순한 내면을 가지고 있어서 남과 치고받고 싸워 본적도 없고, 친구들 또한 순댕이들로 공부, 게임, 블록, 레고, 그림, 볼링, 책읽기, 노래 부르기, 영화보기, 축구하기 이것 이외는 별로 접해 보지 않은 아이였습니다.

이렇게 대학1학년을 마치고, 5월 7일에 oo지방경찰청 기동o중대에 배치 받았습니다.

2. oo지방경찰청 기동 o중대속에서의 생활
경찰학교에서 자대배치 받아 오기전날에는 전화하면서 그곳이 어떤 곳일까로 들떠 있었고 설레임으로, 군기가 빡세다고 하지만 설마 이겨낼 수 없겠나 싶고 어디서든지 열심히 하면 되겠지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엄마 걱정하지 마시라고 하였습니다.

한달의 고된 훈련소 생활을 거쳐서 경찰학교에서 1주일 생활을 하면서 유독 많았던 기수의 전우들 약 800명중에 상위권 성적이면 행정직에 근무할 수 있다하여 몸이 큰 몸집이 아니고 운동으로 다져진 몸이 아니라 도움이 못 될것 같고 행정쪽으로는 자기가 지닌 기량을 발휘할 수 있을것 같아 열심히 이를 악물고 훈련받고 필기시험을 보아 7등을 했다 합니다.

덕분에 본인이 지망한 OO은 되었는데 OO은 의경이 있는 방순대가 해체를 하는 바람에 OO에 있는 OO지방경찰청 기동O중대에 배치를 받았습니다.

그 속에서 본인은 충분히 등수가 앞에 있어서 행정일을 보게 될 줄 알았는데, 전국적으로 인원을 줄이는 관계로 행정일이 아닌 전국 시위진압용부대인 기동 O중대의 O개 소대 중 O소대로 자대배치를 받았습니다.

자주 나오지는 못하지만 OO과 가까운 OO에 온다면서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 새로운 생활을 할 것이라는 기대로 들떠서 경찰학교에서 걸려온 전화목소리는 밝았지만 OO에 온 이틀 후의 전화 목소리는 그저 “엄마!”하더니 아무소리가 안들리고 훌쩍 거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는 군에 가서 한번도 엄마 아빠를 못 봐서 그리워서 그런줄 알았습니다.

몇일후에 선임이 전화를 하라했다 하면서 전화를 한 아들은 “엄마! 제 안경 좀 해놓으세요”하길래 그때도 눈이 나빠져서 그런줄 알았습니다.

그러다가 군에 간지 3개월이 지나 처음으로 얼굴을 보게 되었는데 귀가 잘 안들린다 하고, 안경도 한쪽이 완전 벗겨지고 이상하단 생각이 들긴 들었는데 군의 상황을 잘 모르는 제가 상황 판단을 하지 못했습니다.

근데 그 모든 것이 얼마 지나지 않아 6월쯤에 다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엄마 요즘은 “난 왜 살까요? 난생처음 죽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요!”라는 자식의 말에 부모로서 “너는 잘 해낼거야” 라고는 했지만 자존심이 유독 강한 제자식 성품을 알기에 가슴이 너무 아팠습니다.

어느 월요일 8월 24일이었습니다.

의경은 평일 밤과 토 ․ 일요일에도 쉬지 않기에 2주에 한번씩 중대 외출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렇게 외출은 나오지만 반드시 선임들이 가는 곳에 같이 머물러야 하기에 개인적인 시간활용이 전혀 없어 선임들이 전화를 하라고 해야지만 전화도 합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제게 낯모르는 번호로 네이트 온이라는 채팅 싸이트로 아들이 들어오라 한다 하여 쉬는 시간에 싸이트에 들어갈수 있었습니다.

이야기인 즉슨 경찰대학교가 OO으로 오는데 자기 중대에서 5명을 차출해 간다하는데 SKY다니는 두녀석은 참석하지 말라면서(저희아이도포함)나머지 일경과 이경은 모두 면접을 보라고 했답니다. 아무리 군대지만 본인이 면접에 안되더라도 기회는 줘야 되는게 아니냐면서 아들이 매우 흥분해 있었습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너는 왜 가고 싶은데 하니?

그곳에 가면 구타와 가혹행위가 없을것 같아서요 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군대는 계급사회이니 네가 불합리하다고 불쑥 중대장 밑의 행정반장님께 “저도 면접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세요”하면 너 곤란해질 것 같으니 그냥 참고 인내하는 힘을 기르라고 했습니다. 흥분해 있는 아이를 간신히 달래 놨는데 그날 저녘에 몰래 전화하는 거라면서 부대 내에 비치되어 있는 전화로 전화를 하면서 아이가 울었습니다.

엄마 저희 행정반장님께서 저는요 다른곳에 절대로 안뺏길거라고 하시면서 서류를 감췄다고 전우들이 이야기 하는것을 들었답니다. 그리고 5명중에 1차로 7명을 뽑았는데 2소대에서는 아들과 같이 배치 받은 이경과 바로 위에 있는 기수 이경 3명과 함께 4명이 뽑혔다고 했습니다. 또한 월요일엔 이렇게 7명을 뽑아놓고 최후에 5명을 차출한다 했답니다.

이곳은 일반 군부대와 달리 가장 막내 이경을 완전히 전천후의 일을 시키며 부리고 있는 것 같고 몸은 약하지만 최선을 다해서 하고 있는데 이경이 둘이어서 서로 의지하고 살았는데 그녀석이 경찰학교로 가면 이제는 가혹행위를 혼자 다 겪어야 한다면서 그날 엄청 울었습니다. 사내 녀석이 왜 우냐고 눈물도 참으라 하니 엄마 그냥요 그냥요만 했습니다.

그다음 화요일, 수요일엔 통화를 못했고 오늘 목요일 저녘 8시쯤 전화를 받게 되었습니다.

아들이 말했습니다.

엄마, S대 다니는 그형(자대에 온지 1달된 1소대아이)도 됬대요. 저랑 같이 면접도 못봤는데 어떻게 된걸까요.

분명 어떤일이 있었겠죠?

엄마 아버지가 처음으로 원망스러워 집니다.

제가 이곳을 마음을 달래도 달래도 숨이 안쉬어지도록 힘이 들어 부모님께 기회만 주십사하고 부탁을 드린건데, 제가 완전한 힘을 빌리자는 것도 아니고 기회라도 공평하게 가져서 경찰대학으로 가던지 말던지를 하게 해달라는 것이었는데 부모님은 체면이 무엇인지 그것 때문에 저버리시고... 그러면서 펑펑 또 울더니 엄마 저는 왜 이렇게 되어가고 있는거죠?

하면서 사실 엄마 제가 이런말씀 드리면 안되는데요.

오늘은 드릴래요.

엄마 죄송해요 하면서 아들은 제게 가슴이 막뛰는 이야기를 토해내었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많이 맞고 있습니다.

이유는 막내기 때문 이래요

가혹행위에 시달려 온몸이 멍이 들어 있어서 어쩌다 휴가로 집에 오면 윗도리를 가족들이 상심할 것 같아서 그 앞에서 못 벗기도 했고요

제가 깜짝 놀라서 그럼 안경도 그래서 그랬구나

귀도 그랬구나 .

살짝 장난하느라 배를 쳤을때 갑자기 풀썩 주저 앉았던 것도 그래서 그랬구나 하고 마구 떠올랐습니다.

아들이 쉴새없이 말합니다.

어느 날은 보일러실로 불러서 아무도 없는데서 몇 시간을 때려놓고 하루 종일 혼자 가둬놓기도 하면서 그속에서 움직이지를 못하게 했어요.

어느 날은 기대마(의경들이 타고 다니는 버스)로 불러서 아무 이유도 없이 선임이 화난다고 무려35분이나 발로 짖밟혔습니다. 제가 그때 무슨 생각 한줄 아세요. 나 만물의 영장인 사람 맞나? 이거였습니다.

어느 날은 하루종일 물을 안먹이기도 합니다.

매일 매일 침대에서 팔굽혀펴기를 300번씩 합니다.

어느 날은 잠도 안재우고요.등등

그러더니 엄마 저는 왜 살고 있을까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요즈음은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네요.

제가 어릴 때부터 누구를 때려 본적도 없고 때리고 심하게 싸우는 친구들도 단 한명도 없었기 때문에 첫날 부대에 배치를 받자마자부터 인사하는 방법도 안가르쳐 주고 인사 못한다는 이유로 2시간을 맞았고, 그 다음날도 새벽부터 이유 없이 맞고, 그 다음날도 또 맞고 하여 쇼크를 받아서 며칠 지난 후 엄마에게 전화를 하고 보니 눈물이 나서 창피하기도 하고 해서 숨죽여 눈물을 흘리게 되었다는 겁니다.

시위를 진압하려면 싸움을 잘해야 하는데 그건 자기가 열심히 해보려고 했으나, 그 이외의 것들이 힘들기에 부대 속에 위치한 전우들이 너무나 전우애도 없이 휴가 다녀오면서 부모님이 싸주신 로울케잌 5섯 꾸러미는 최고 고참들만 먹고 나머지는 구경도 못하는 이곳! 여기가 사람인 군인 사는 곳 맞는지 의심스러웠습니다. 군대 동기 주려고 다리에다 쵸코다이제를 랲으로 돌돌 다리에 말아서 보일까싶어 긴양말 신고와서는 잠자는 이불속에서 동기를 다부스러진 쵸코다이제 과자를 주었노라고 하였습니다. 마치 거짓말같은 진실입니다.

여러분 이곳이 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 맞습니까?

어떤 선임은 제가 집에서 가져온 소품을 이경이라고 물건(지갑 및 세면용품, 양말, 팬티, 수건)다 가져가고 때리고 가혹 행위 하는 이곳에서 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곳에 온지 벌써 4개월입니다. 하더니 또 아들이 말합니다

제가 OO에 오던날 어떤 OO이 자살을 시도했는데 미스된 것이 그때는 사내 녀석이 그것도 못 참아서 그 귀한 목숨을 버릴 생각을 하나 했는데 이제 이해가 되요

정말 숨을 쉬질 못하겠어요.

생전 처음으로 죽고 싶다는 생각을 자꾸하게 되요 이러는 겁니다.

그러면서 전화가 끊겼어요

그 시간 이후로 저는 불안해서 정말 불안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었습니다.

지난번에 자살 미스된 그 아이 사건도 누구한테 잘잘못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경찰서에서 무마를 시키고 다른곳으로 발령냈다 하고, 에미인 저는 제 자식도 구타와 가혹행위가 그렇게 심한데도 그냥 더 있다가는 무슨 사고를 낼것만 같은 불안한 마음이 자꾸 어리석게 들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의 미니홈피에 비공개 다이어리에 있는 내용을 읽어보면 난 밥을 1분안에 먹는다. 밥을 4등분해서 맛도 모르고 늘 먹는다 그것을 어기면 어김없이 구타를 당한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하지만 난 남자니까 더 열심히 하자라는 구절이 제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평균 4시간 자는 잠과, 하루 종일 궂은일과 구타와 가혹행위와 시위를 막아야 하는 일을 병행하는 제 아들은 3박4일 또는 2박3일의 두달에 한번 있는 휴가를 오면 점점 넋이 빠진 아이처럼 집에 오면 멍하게 있거나 잠만 자고 갑니다.

아~ 군대는 인권도 없단 말입니까?

군대에 있는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이 아닙니까?

어떻게 민주국가라는 대한민국에 이런 Black Hall이 있답니까?

제가 이런 상황에 처해있는 아들에게 더 견디라고는 못하겠어서 전화를 받으며 같이 울고 말았습니다.

본인의 의지와는 달리 늘 시달리는 가혹행위와 그나마 그 가혹행위를 같이 입대한 이경동기와 버텼는데 그 전우와 그래도는 숨을 쉬게 해주는 바로 위에 기수의 이경들도 경찰학교에 차출되었다고 연락이 왔다 하기에 혼자 남은 앞으로의 내 아들의 소대 생활은 더욱 힘들어 질거라는 불보듯 뻔한 상황이 연출 되리라 생각이 들으니 심장이 뛰고 어찌 할바를 몰랐습니다.

어찌 휴일도 없어서 또 밤에도 교통방범을 나가거나 시위진압을 하게 되어 고단한데 선임과 후임들이 서로 챙겨주지는 못할망정 이렇게 힘들게 구타와 가혹행위를 하여 몸도 힘들고 마음도 힘들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O소대와 O소대는 후임병이 왔다는데 벌써 4개월이 지난 아들이 있는 O소대는 후임병은 오지 않고 의경을 줄이는 추세라서 12월에나 올까 말까 한답니다.

저는 매일 기도했습니다.

군대라는 곳이 서로 낮설으니 서로 사랑하며 이해하고 개념있게 사는 의경들이 되어 근무할 수 있게 하느님 헤아려 주시길 진심으로 간청드립니다. 이렇게요

제가 아들의 생활을 이렇게 낱낱이 말씀드리는 것은 인간이 사는데 가장 힘든게 인간대접을 못 받는 것인데 그 일을 매시간 마다 그렇게 받고 행여나 그것을 부모님이 알아서 항의라도 할까봐 말없이 지낸 내 아들이 한없이 안타깝고, 더욱 두려운 것은 혹시나 무서운 사고를 칠까봐 걱정이 많이 됬었고, 내 아들이 받을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를 알아두시라고 낱낱이 고하는 것입니다.

아들 말대로 아들이 얼마나 인권을 짖밟음을 당했으면 엄마한테 이런 이야기를 하겠어요

엄마 죄송합니다. 이러면서 제 인생이 이렇군요 하면서 우는 아들을 그날은 더 이상 달랠 수가 없었습니다. 어리석게도 자식과 함께 저도 엄청 울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그렇게 흐르며 쌍용자동차사건땜에 평택에 출두하고, 당진에 다녀오고, 검렬준비하며 쓰러지기도 하고 한여름에 구보하다가 쓰러지기도 하다가(병원엔 안다녀옴) 소화가 안되고 아침구보시간에 조금씩 토하는 일이 생겨 본인스스로 안되겠는지 OO에 있는 내과를 다녀왔다합니다. 군에 가 있는 아들을 빼다가 병원을 데리고 갈 수도 없고 어찌 할바를 몰라 했던게 9월말부터 12월까지 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9월에 나온 휴가는 2박3일동안 많이 아파서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귀대하고, 수능 임박한 11월에 나온 휴가도 역시 잠을 못잔다며 새롭게 간 행정반은 행정병일만 하는게 아니고 여러 가지 일을 한다며 무엇보다도 도덕적이지 못한 일을 책임져야 한다는게 힘들다 며 스트레스를 호소하였습니다.

12월 초가 되니 가끔 들어오던 네이트온도 들어오지 않길래 얼마나 아픈가 걱정이 되어 그때 제가 저희 아들 미니홈피 방명록에 거의 매일 괜찮은가의 질문으로 남겼습니다. 기특한것인지 바보인지 군기라는게 그런건지 병든 육체를 군에서 아프다는 소리도 큰소리 내지못한채 여전히 맞고 제자식은 견디고 있었습니다.



3. 아들의 영원한 휴가가 된 날

어느날 2009년 12월 20일 밤12시!

휴가가 허락이 안난다 하더니만 전화하여 갑자기 내일 휴가갑니다.하고 전화를 끊는 거예요 뭔가 수상하여 아빠가 아침 일찍부터 부대앞에서 기다리니, 완전 초죽음상태의 아이가 휘청거리면서 나오길래 그길로 단대병원에 응급실에가서 건강검진을 하다말고, 너무나 깜짝놀랄 일이 생긴거예요.

의사가 말하길 급성혈액암입니다. 아마 발병은 3개월쯤 된것 같습니다.

내비두면 사망에 이르니 경찰또는 군인병원은 고칠 수 없으니 major병원을 가르쳐주면서 얼른 옮겨가라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하루밤을 단대병원에서 자고 다음날 서류를 준비하여 혈액암의 최고라는 카톨릭서울성모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4. 아들의 서울카톨릭병원에서의 투병생활

커톨릭서울성모병원에 도착하긴 했으나 환자가 워낙 많아서 무균실이 필수인데 무균실에 자리가 나지 않아 일주일을 병원 응급실에 대기하다가 2인실에 2일 입원했다가 19층 그 무시무시한 무균실에 가게 된것입니다.

그곳에서도 의사는 병이 난것이 3개월쯤지난것 같은데 9월말이나 10월초쯤 발생 했을거라면서 힘들지 않았니? 이렇게 물어보시더라고요.

구보하다 쓰러지고, 자꾸 쓰러졌을때 혼만 내지 말고 관리자들이 좀 살펴보지라는 원망을 했습니다.

여러분 제가 이렇게 쓴 내용엔 거짓이 없습니다.

저는 크리스찬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그곳에서 아들의 입장이 되어 견디어 낼 수 있었을것 같습니까?

그때부터 엄마와 아빠는 학교와 직장에 휴직계를 내고 거동조차도 못하는(군에서 견딘게 용하다고 의사가 여러번 말했습니다)아들덕에 원래는 보호자라도 무균실에 못 들어가는데 몸을 못 가누는 아들을 도와주러 들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희 부부는 고3딸은 천안에 두고 한사람은 병원 밖 복도에서 자고 한사람은 아들옆에서...

그러나 1차도 2차도 항암치료는 관해가 되지 않은 악성인자를 지닌 혈액암이었습니다.

여러분 그 절망감 그 허망함 아쉽고 안타깝고 아득한 마음 아시나요.

자식은 나의 미래이며 희망이며 열정입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른채 퇴원도 할 수 있는 수치가 아니라서 금식을 90여일이나 하면서 그곳에서 6개월을 있는 내 아들에게 엄마인 저는 아무것도 해줄수가 없었습니다.

어느날 병실에 들어오니 아들이 울고 있었습니다.

자기 손을 내밀면서 운명선이라 하는 손금이 자기는 갑자기 짧아졌으니 엄마 10년만 죄송하지만 제게게조금만 나눠주세요 하는겁니다.

제가 먼저 하늘에 가면 그것처럼 불효는 없는 것이고 제가 할 일이 많으니 그 10년동안 다 해놓고 가겠다며 조금전에 텔레비전에서 부모보다 자식이 먼저 하늘에 가는 어떤 프로그램이 나왔는데 그것을 보니 눈물이 나요 엄마 엄마 근데 난 오래살거에요. 꼭 살아서하고 싶은것 다할래요 하며 의지를 다져갔습니다.

우리 아들은 하늘에 간 2010년 6월 30일까지 1인실에서 참 외롭게 균이 옮을까봐 의료진이외는 거의 못만나면서 지냈지만 늘 희망적이었고, 이를 악물고 사투를 벌였고, 여전히 엄마 아빠 사랑해소리 하며 파이팅외치며 마지막 날까지도 제게 새로운 프로젝트를 한글이 생각 안난다며 손에 힘이 없어 흔들흔들 쓴것을 보여주며 삶을 끈질기게 붙잡았습니다.

아들의 희망은 세가지였습니다.

첫째는 공부를 계속해서 과학자가 되어 사회의 든든한 밑받침이 되고 싶어했죠!

둘째는 사랑을 많이 하고 싶어했습니다. 평생하고 열심히 베푼다 했습니다.

셋째는 봉사였습니다. 그저 공부만 하느라 제대로 봉사는 못했지만 워낙 효심이 극심한지라 잘했을것입니다. 병상에서 한 마지막 봉사는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본 승가원에 태호에게 군대에서 맞아서 눈이 한쪽이 잘 안보여서 엄마 아빠가 다시 사준 멀티비전노트북(두번 사용했죠)을 주라해서 가져다 주었습니다.

사랑하는 내 아들은 자기를 아프게 한 누구를 원망하는 것보다 그 아픈 병원생활에서도 기동O중대 대원님들과 행정반장님께 늘 감사했고, 백혈구를 나눠주러 서울까지 연속 3일이나 22명의 백혈구를 나눠준 군의 동기들의 그 따뜻한 마음에 저희 아들도 늘 병상에서 이번에도 고마워라 이러면서 맞았습니다. 근데도 지금 내 곁엔 내 아들이 가고 없지만 가혹행위와 구타를 행한 미운자들도 잊지 않겠지만 훈훈한 그대들도 잊지 않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또한 혈소판 헌혈로 많은 도움주신 분들 또한 매우 감사하며, 또한 제아들로 인하여 숱한 공문처리를 했을 행정반원들께도 감사하며 장례식에 남아서 밤새워주웠던 군의 나이동기 친구 다섯명과 초.중.고.대학교 친구들, 초등학교 선생님 두분, 중학교 선생님 두분, 고등학교 선생님 세분 고맙습니다. 연락도 안했는데 장례식에 많이 오신것을 보니 제자식이 헛되이 살지는 않았나보다 잠시 생각했지만 우리 아들은 이세상 어디에도 어느곳에서도 숨결도 체취도 느껴지지 않는 하늘의 무너짐 그 자체였습니다.



5. 아들이 하늘로 갔다

이렇게 저희 아들은 6개월하고 조금 넘은 투병생활을 끝으로 2010년 6월 30일 오후 5시 10분에 그 고통 다 잊었는지 얼굴에 살짝 미소를 띄운채 지구에 소풍을 왔다가 돌아갔습니다. 아쉽고 안타깝고 숨이 안쉬어질 정도로 가슴이 아파 레테의 강을 엄마는 여러번 건너고 있습니다.



6. 아들을 현충원 집에 데려다 주다

제가 오늘 홈피를 찾아온 것은 감사의 인사와 하늘에 있지만 우리아들의 인권을 찾아주기 위함입니다. 균에 감염되면 즉시 사망에 이르는 심각한 중증장애의 백혈병인지라 군인임에도 불구하고 경찰병원으로도 한번도 가지못한채 온갖서류를 갖추어 어렵게 어렵게 공상처리가 승낙이 되어 지금 우리 아들은 현충원에 순직자 수경으로 자리를 잡고 주변에 나라를 위해 이렇게 하늘에 가신 순국선열들과 함께 있습니다.

물론 저는 레테의 강을 자꾸 건너게 되고 불면증과 억울함과 아까움과 이루 말할수 없는 참척의 슬픔을 겪느라 학교에 복직을 못한채 자식이 그리워 그것이 아픔이 되었습니다.



7. 국가유공자(순직)지정 해당이 안된다고 보훈처(02-2020-5470)에서 결정

며칠전 당연히 될거라고 알았던 유공자가 해당이 안된다고  재심을 한다고 하여 제 남편이 서류를 또다시 준비하며 두 번 다시 가기 싫은 성모병원과 군부대를 다니면서 잃어버려지면 안된다며 아들의 인권을 반드시 찾아야 한다고 준비중에 있습니다.

누가봐도 신검에서 1급 판정을 받아 군에 간 아이가 9개월만에 급성 백혈병이라는 병에 걸려 집에 돌아온걸 이해 할 수 있겠습니까? 경찰청 심사에서 공상으로 순직처리된 아이가 보훈처에서는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고 책상머리에 앉아 비해당이라니 가슴이 찢어지고 너무 억울하여 네 자식이 이렇게 죽었어도 그렇게 결정할 꺼냐고 보훈처에 묻고 싶습니다. 그런 사람 봉급을 주려고 내가 세금 내는 것이 너무 원통합니다.

촉망받는 젊은이가 얼른 군대 다녀와서 날개를 활짝 펴고 비상하려던 그 꿈은 누가 짖밟은겝니까?

사랑하는 아들, 사랑하는 오빠, 사랑하는 조카의 부재가 아픔으로 가득 차버리게 된 가정은 누가 만들어 준겝니까?

그것이 바로 잘못 되버린 군대입니다.

의사도 말하였습니다.(단대병원, 카톨릭서울성모병원)

백혈병은 원인이 없지만 갑자기 생긴 스트레스가 병을 유발시키는 병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고요.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국가유공자(순직)지정을 받았어야만 했습니다.

그렇다면 저희아들이 받은 고통과 스트레스를 생각해보십시오.

기동대 일부 선임의 괴롭힘으로 심한 스트레스가 되어 우리아들은 저희집안에 전무후무한 혈액암을 앓게 되었다고 저는 믿습니다.

가. 5월 7일 기동대 오자마자 아무것도 안가르쳐 주고 인사 해보라고 하고 못하자 2시 간이나 때리신 분

나. 내아들의 소지품 압수해 가신분(그곳엔 주민등록증과 지갑도 있었습니다)

다. 기대마(아들이야기는 의경들이 타는 차)에 데려가서 이유없이 정확히 35분동안 아들 을 발로 밟으신분

라. 보일러실에 하루종일 꼼짝 못하게 한 자세로 세워놓으신 분

마. 하루종일 물 한모금도 못마시게 하신 분

바. 방패로 이마 위에 머리 내려치신 분

사. 12월에 너무 아파 내과에 다녀오니 죽먹으라 하여 말하니

    죽은 커녕 아무거나 쳐먹으라고 막말하며 때리신 분

아. 제 아들 손가락을 본인 발가락에 끼고 맛사지 시키신 분

바. 후임병없이 4개월을 혼자 수발들며 이리뛰고 저리뛰고 살았을 내 아들

사. 지휘감독관들은 과연 이렇게 이아이가 힘든지를 몰랐을까요

위에 있는 내용은 제 아들이 병상에서 내가 이렇게 살았어하며 신세한탄을 하며 제게 알려준 것을 쓴글입니다.

8. 아들의 인권을 반드시 찾기위해 나는 산다.
“사랑은 받은자만이 올바르게 베풀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모여 문화를 이루는 곳이 군대입니다.

내 기준에 의하여 타인을 취급하면 안되죠?

우리는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이며, 그 생각이 건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군대가 된다면 누구나 군대가는 것이 두렵지 않고 인생의 안식년이라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기회로 삼아 멋진 인간이 되어 사회에 나올 수 있는것 아닌지요

여러분!

신검1급 판정받고 9개월만에 급성백혈병걸려 6개월을 투병하고는 22살의 꽃다운 나이에 하늘에 아들을 나는 보냈습니다. 현대의학으로는 그 경지까지 밖에 가지 못했답니다.

이렇게 억울할데가, 이렇게 분할데가, 왜 하필 내 새끼에게, 왜 하필 내 가족에게, 이런일을 만들어 주십니까?

그러나 내가 내 새끼에게 해줄수 있는 것은

내 새끼에게 잘못하여 죽음까지 이어진줄을 모르고 잘사는 용서를 빌줄 모르는 자에게 반성의 기회를 주어 선내보를 주는 것이고,

또 하나는 22년의 짧은 생을 아깝게 간 내자식의 인권을 찾아 국가유공자가 되어 나라를 지키다가 순직했음을 일깨우는 일입니다.

부디 국가유공자가 되어 그 아이의 순직이 헛되지 않게 되기를 최선을 다할것을 맹세합니다.

이 긴글 읽어주시느라 고맙습니다.

우리 아들 스테파노를 위해 그 아이의 평안한 영면을 위해 많이 기도해 주시고,

응원해주세요

간절히 호소드립니다. 저의 아들 억울함을 풀어 주세요. 꼭 부탁드립니다.

글쓴이 아지

원본 기사 보기:amn.networ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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