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탈로찌 어린이마을 아리랑 이야기스위스통신 전쟁고아 마을로 탄생, 한국인 20명 커 교민사회 버팀목스위스의 철학자 왈터 코르티(Walter R. Corti) 가 1944년 언론에 "너는 전쟁고아들을 위한 마을을 건설하라!(Du" auf, ein Dorf fuer Kriegskinder zu bauen) 라는 글을 발표하고, 일년 뒤 스위스 국민들의 큰 지지 속에 페스탈로찌 어린이마을(이하 KDP, Kinderdorf Pestalozzi)을 아펜첼(Appenzell) 주에 있는 트로겐(Trogen) 마을에 세우게 되었다.
이름도 스위스 취리히 태생의 계몽가 페스탈로찌(1746-1827)의 " 교육은 대중을 위한 자연적 권리이며, 아무리 천한 계층의 어린이라도 교육이 주어지지 않으면 안된다" 라는 철학의 영향을 받아 페스탈로찌 어린이마을로 지었다.
이들은 같은 나라에서 온 어린이와 교사(가정 부모님이라 부름)들이 한 집에서 같이 생활하며 그들 각자의 문화와 언어를 사용했다. 대부분의 어린이들은 9-13세였으며 고등교육이나 직업교육이 끝나면 조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원칙이었다. 1965년 처음으로 한국어린이들이 트로겐 마을로 들어왔다. 언덕 위의 한국의 집은 "아리랑"으로 불리웠으며 집번호는 7번이었다. 모든 어린이들은 스위스로 오기 위한 채용시험을 통과해야 했다. 처음엔 교사의 자녀 셋을 합해 모두 20명이었다. 아리랑에서는 한국어로 수업했으며 국어, 사회, 한문을 가르쳤다. 아이들은 낯선 이국 땅에서 그나마 서로가 위안을 주고 받았을 것이다.
아이들은 모국어를 잃지 않았으며 한국인에 대한 정체성 또한 잃지 않았으리라. 아리랑 집은 이 마을에서 가장 탁월한 집으로써 늘 칭찬을 받았다. 이 또한 한국인의 교육열이 아니었을까... 일요일은 스스로 요리하는 날이었으며, 아리랑에서도 여자아이들은 요리를 했고, 남자아이들은 밖에서 축구를 하고 나중에 설겆이를 했다. 이렇게 그들은 고향의 맛도 잊지 않았다. 모든 아이들은 악기를 선택해서 배울 수가 있었는데 주로 피리와 피아노였다. 당시 한국에서의 형편에서는 불가능한 특권이기도 했다. 그들은 물질적으로 풍요로왔다고 말한다. 하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정체성... 그들은 행복하지 못했다.그리고 찾아 온 사춘기... 쉽지 않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시간이 흘러 한국은 부강한 나라가 되어 갔고, 1989년 아리랑은 문을 닫았다. 그 때까지 약 50명의 한국어린이들을 아리랑에서 키웠다. 이들 중 거의 모두가 한국에 돌아가지 않았으며 현재 스위스에서 각자의 삶들을 살아가고 있다.
일년에 크게는 한번씩 "아리랑 모임"을 가지고, 작게는 가까이 사는 형제자매들이 되어 서로가 돈독하게 우애를 가지고 스위스 교민들의 든든한 버팀목의 기성세대들이 되었다. <저작권자 ⓒ 인터넷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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