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알프스에 올라 높고 청정한 하늘, 청조하고 장엄한 모습으로 열려 있는 셀 수 없이 많은 봉우리들을 바라보노라면 어찔해진다. 그것은 떨림이며 황홀한 신비의 서스펜스이다. 그림처럼 끝없이 펼쳐지는 거대한 봉우리들을 바라보며 금강산 일만이천봉이라는 귀절을 생각한다. 그리고 알프스는 과연 그 봉우리가 몇 개나 될까도 생각해본다. 아직까지 금강산을 가 보지 못해 그 산의 규모나 위풍을 쉽게 짐작할 수는 없으나 금강산이 일만이천봉이라면 알프스 전 산맥에 깔려 있는 봉우리는 확실히 수 십만 개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또 하나 의문은 금강산의 최고봉은 누가 정복했을까 하는 것이다.
평탄함을 거부하는 듯 도도하게 하늘 향해 치솟아 있는 산은 끊임없이 사람들을 부르고 도전정신을 갖게 한다. 산악인들은 산을 오르는 일을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힘겨운 중력에 대한 저항이라고도 한다. 그런 자연에 대한 저항과 순응에 대한 정복사의 기록들이 있다. 백두산이나 한라산에도 이러한 기록들이 있을까? 알프스의 정복사를 보면 여러 가지로 흥미롭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은데 그 중에서도 마터호른(Matterhorn 4478m)의 정복과정은 알프스 역사 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이다.
이 지구상에 수많은 산과 정상 중에 가장 아름답고 인상적인 산이 어떤 산이냐는 물음에 백이면 99명의 등산가들은 알프스의 마터호른을 꼽는다고 한다. 발리스(Wallis)주에 우뚝 서 있는 그 웅장하고 독특하게 각진 자연의 피라미드, 그 장엄한 모습은 1865년까지 인간의 접근을 거부하고 있었다. 1857년 영국의 런던에서 구성된 알파인 클럽은 알프스의 깃봉을 하나하나 점령해 나아가고 있었으나 1865년까지 마터호른만은 그들이 풀지 못한 숙제였다. 1860년 영국인 에드워드 윔퍼(Edward Whymper)라는 20살의 청년이 당시 런던의 한 출판사로부터 알프스산의 수채화 제작의 임무를 띠고 발리스에 오게 되는데 이 청년은 도착 당시부터 주위의 정상 도전에 열광하게 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지금까지 아무도 오르지 못한 마터호른의 정복을 꿈꾸게 된다. 윔퍼의 꿈은 결코 안일한 게 아니었다. 당시 마터호른 정복에 대한 경쟁은 이미 여러사람들로부터 도전을 받고 있었는데 몇몇 영국인들이 이미 여러차례 마터호른에 대한 정찰을 마친 상태였고 특히 파커(Paker)라는 세 명의 형제는 1860년 인도자 없이 이미 3600m 높이까지 진출을 하고 있었다. 마터호른 정복 집념은 스위스 쪽에서만이 아니라 마터호른의 다른 쪽인 이탈리아 지역에서도 불이 붙고 있었는데 그 당시 이탈리아의 오스타(Aosta)에서 외국 관광객 안내로 생활비를 벌며 자연과학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던 카노니쿠스 커렐(Kanonikus Carrel)과 그 젊은 친척이 되는 3명의 젊은이 역시 정상 정복의 야심적인 도전을 하고 있었으며 그들 역시 이미 이탈리아 쪽 마터호른의 난코스인 텔테두리온(Tel te du Lion, 3715m)까지 진출의 경험을 쌓고 있었다. 정복을 향한 불 붙는 도전 속에서 1865년 7월 14일 4478m의 마터호른은 결국 윔퍼와 그 동반자 여섯 명에 의해 정복되는데 이 일곱 명의 그룹 구성과 그 과정이 여러모로 흥미롭다. 윔퍼는 원래 이탈리아인 커렐을 동반자로 선택했으나 커렐은 윔퍼를 경쟁자로 간주하여 그의 계획을 방해하는 상황까지 발전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시 체어마트(Zermatt)에 살고 있던 등산 인도자 타욱발더(Taugwalder)와 그의 두 아들이 윔퍼의 계획에 동참하게 되며 정복 삼일 전(7월 11일) 체어마트에 여행자로 들어 온 프란시스 더글라스 경(Lord Francis Douglas)이라는 18세의 젊은 영국청년(그는 몇 일 전 마터호른 주위의 산 오버가벨호른(4063m)를 정복한 경험자)을 만나게 되고 그 역시 윔퍼의 계획에 열광, 동참을 약속했다. 정복 이틀 전(7월12일) 윔퍼가 묵고 있던 체어마트의 몽테로사호텔에서 영국인 성직자 허드슨과 그의 여행 안내자 미셸 아구스트 크로즈(Michel Auguste Croz, 프랑스 샤모니 태생으로 1859년 몽블랑 정상등반)와 허드슨의 친구인 하도우라는 세명의 동반자를 알게 되며 이들 역시 곧 윔퍼의 계획에 참여하게 된다. 윔퍼가 구성한 그룹은 모두 8명으로 그 중 한 명(Taugwalder 두 아들 중 하나)은 7월 14일 가지고 갔던 짐의 운반을 위해 다시 체어마트로 돌아가게 되고 나머지 7명인 윔퍼, 더글라스, 허드슨, 크로즈, 하도우, 그리고 타욱발더와 아들이 정상정복에 참여하게 된다. 48시간 만에 급조된 이 그룹은 서로가 서로를 잘 알지 못하는 타인들로서 모두가 정상정복이라는 열차에 뛰어오른 낯선 이방인들의 모임이었다. 7월 13일 새벽 체어마트를 떠난 그룹은 슈바츠제(Schwarzsee, 2583m) 주위에서 밤을 지내고 7월 14일 6시 20분에 이미 3900m 높이까지 오르게 되며 거기서 잠시 휴식을 하고 난 후 9시 55분 마터호른 상봉 가까이 왼쪽으로 기우는 가파른 경사 지점에 도착한다. 크로즈가 선두를 지키고 그 뒤를 윔퍼 등이 순서로 40도에 가까운 경사와 부분적으로 눈과 얼음으로 덮힌 어렵고 가파른 경사를 지나 13시 40분 마침내 마터호른의 정상에 발을 디디게 된다. 지금까지 아무도 디뎌보지 못했던 미지의 세계를 정복한 승리의 기쁨과 환희 그리고 눈 아래 펼쳐지는 알프스의 장엄한 풍경은 쉽게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환상의 세계엿으리라. 하지만 정상에 첫발을 디딘 윔퍼가 제일 먼저 생각했던 것은 경쟁자 커렐이 먼저 도착을 했지 않았나 하는 걱정이었다고 한다. Carrel도 7월 11일 출발 이탈리아 쪽에서 정상정복을 시도 했으나 중간에서 윔퍼의 정상정복을 확인하고 포기하게 된다. 정상에서 환상적인 시간을 가진 이 그룹은 마지막으로 북쪽 봉우리에 천막용 막대기를 꼿고 Croz의 점퍼를 걸어 엉성하게 만든 기념 깃발을 세우고 남쪽 봉우리에는 돌을 모아 작은 기념탑을 만든 후 하산 준비를 하게 된다. 마터호른의 정상은 약 100m의 거리로 스위스지역 북쪽 봉우리와 이탈리아지역 남쪽 봉우리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우리가 흔히 아는 산에서의 사고는 오를 때 보다 내려올 때 많이 난다는 상식은 이들에게도 적용된다. 사천 미터가 넘는 급경사 산을 기어오르긴 했으나 발 밑으로 내려 보이는 수천미터의 낭떠러지와 절벽은 하산을 준비하는 그들의 마음을 두려움으로 쌓이게 만들었다. 특히 그들이 지닌 장비란 얼마 안되는 밧줄과 자신들의 경험 그리고 산을 내려갈 수 있으리라는 불확실한 자부심 뿐이었으니까. 처음부터 위험을 느낀 그들은 우선 열을 정비하고 조심스럽게 각자의 몸을 밧줄로 연결했다. 경험이 많은 크로즈가 선두에 서고 그 뒤에 경험이 거의 없었던 하도우가, 그리고 허드슨, 더글라스, 타욱발더, 윔퍼, 타욱발더의 아들이 따르게 된다. 두려움으로 마음이 무거웠던 그들은 오후 3시 정상(정상 밑에서 봉우리가 왼쪽으로 기울기 시작하는 지점)을 오를 때 가장 힘들었던 급경사 지점에 다시 도착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앞서 가던 크로즈가 경사지점 바위 밑으로 조심스럽게 발 디딤을 찾고 있을 때 뒤 따르던 하도우가 갑자기 밑으로 미끄러져 내렸다. 뒤 밧줄에 연결된 허드슨과 더글라스 역시 연쇄작용으로 미끄러지면서 순식간에 4명의 몸무게가 한 밧줄에 매달리게 된다. 바위 뒤쪽에서 3명이 온 힘을 다해 밧줄을 지탱하려 했으나 그 밧줄은 몇 초를 견디지 못하고 끊어지고 말았다. 4명의 동료는 1200m의 가파른 절벽 아래 빙하로 추락, 그들의 운명을 다하게 되며 뜻하지도 않았던 동료의 죽음으로 슬픔과 비탄에 젖은 윔퍼와 타욱발더 부자만 그 날 다시 체어마트로 돌아오게 된다. 나중에 허드슨, 하도우, 크로즈의 시체는 마터호른 빙하에서 찾아 체어마트에 안치되나 젊은 더글라스의 시체는 영원히 실종된 것으로 알려졌다. 4명의 목숨을 요구했던 비극의 마터호른의 정복사는 15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윔퍼가 자신의 안위를 위해 줄을 끊었다는 구설수가 있으나 그것은 증명되지 않은 이야기일 뿐이다. 마터호른의 정복사는 영국인윔퍼의 이름괴 함께 알프스의 역사 속에 영원히 남아있게 되었다. 특히 이 정복사는 체어마트의 마을 중심에 있는 산악 박물관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고 몽테로사 호텔 입구 쪽에 새겨진 윔퍼의 흉상과 함께 체어마트 공동묘지에 묻힌 여러 산악인들의 묘지가 있다. 비극으로 끝난 마터호른의 정복 주인공 윔퍼는 나중에 그론란트(Groenland)와 남아메리카 안데스 산맥 탐험에 참가(1880년)했다. 그는 또 '정상으로 오르는 먼길'(Der lange Weg auf den Gipfel)과 '알프스 등반'(Scrambles among the Alps) 등의 저서를 남겼다. 1840년 런던에서 태어난 그는 1911년 프랑스의 샤모니에서 그 생애를 마쳤다. <저작권자 ⓒ 인터넷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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