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스 영봉·호수·빙하 하루여행기스위스통신 "집안어른·동생부부 데리고 스위스 5백리길 돌아..."
햇볕이 쏟아지면 갑자기 무척 더워지기도 한다. 비록 짧은 하루여행이지만 두터운 스웨터와 비옷은 산행의 필수품이다. 깊은 산속의 비밀을 누가 알랴. 산신령님이 심술을 부리면 한여름에도 산에는 눈발이 바람을 타고 흩날린다.
가는 도중에 경치 좋고 한적한 명당을 만나면 쉬면서 먹을 수 있는 도시락거리를 준비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취리히 - 트리프트글레쳐 - 수스텐 - 루체른 - 쥐리히 여정은 어림잡아 300km는 될 것이다. 늦어도 아침 6시 30분에는 출발해야 한다.
트리프트글레쳐, 발음하기조차 어려운 만큼 가는 길도 험할 것이고 더구나 초행이라 여유있게 시간을 잡아야 한다. 한국에서 온 일행들은 아직 시차에 적응되지 않아 새벽 4시만 되면 집안 여기저기서 쿵쿵거린다.
4시에 출발하면 어떨까? 이른 아침 조용한 고속도로를 맘 푹 놓고 달리는 기분은 상쾌할 것이고 흘러간 노래 한 곡 뽑으면 흘러간 날의 추억이 무지개처럼 펼쳐질 것이다. 비싼 자동차 몬다고 코를 꽁무니에 바싹대고 헤드라이트를 번쩍거리는 인간도, 고속도로가 제집 안방인양 고목처럼 운전석에 앉아, 달구지 몰고 가듯 유유자적하는 회색의 청춘도 없는 이른 아침의 고속도로는 신선할 것이다.
꼬불꼬불 구절양장의 고갯길을 올라와 보니 덩치 큰 PTT(우체국버스)버스가 두 대나 호텔 앞 주차장에 대기하고 있다. 그 비좁은 길을 어떻게 올라왔을까? 마주 오는 자동차를 피하려면 꽤 힘든 씨름을 했을텐데. 조금 뒤 버스는 "띠, 따, 또" 경적을 긴 산울림과 함께 남기고 느릿느릿 미끄러지듯 내려간다.
길고도 긴 저수지가 Y자로 누워 있는 해발 2000m 산 속인데도 움직이면 땀이다.연로하신 아버지와 고모부 내외, 그리고 여동생 부부, 그리고 나는 유명한 온천 로이커바드(Leukerbad)에 몸을 담갔다.
온천하면 심기(心 氣)를 조절하기 위해 호흡을 가다듬는 머리 허연 노인들만 앉아 있을 거라고 상상했는데 새파란 젊은이들과 아이들로 혼잡하다. 어떤 탕에서는 콧소리를 약간만 내도 크고 긴 소리가 울린다.
점심은 한적한 곳을 찾아 준비해간 도시락으로 먹었다. 유럽의 빵이 입에 맞지 않으신 어른들을 위해서, 물론 우리 젊은이들도 마다할 수 없는 한식도시락이다.
어른들은 나라와 말과 글과 역사까지 송두리째 수탈한 일제가 민족을 탄압하고 착취할 때에 소학교를 다녔다. 2차대전의 궁핍함을 겪고, 6.25 동족상잔의 피비린내와 처참한 파괴와 살상을 목격한 분들이다.
나라와 민족을 지키는 용감무쌍한 군인으로 훈련받기는커녕 훈련소 첫날부터 이유 없는 구타와 굴욕으로 울분의 눈물을 삼켜야 했고, 제대할 때까지 허기에 시달렸던 3년 세월의 군대생활을 감내한 어른들이다.
기근과 절망, 폭력과 혼돈이 지배하던 암울한 시절. 대개 고무신을 신었다. 고무신을 신고 축구를 한다며 공을 차면 공보다 신짝이 더 멀리 날던 때다. 힘없는 무명실로 짠 누르스름한 목양말은 신은 이들치고 발꿈치에 구멍 안난이가 드물던 때다.
어머니,할머니들은 식구들의 헤어진 양말 깁느라고 밤늦게까지 호롱불 밝혀 놓고 그 아래에서 정담을 주고 받았다. 그 일이 귀찮거나 지겹다고 생각했다면 모두들 정신병원으로 갔을 것이다.
헐벗고 배고파 허리띠를 졸라매고 살아가는 비참했던 날들. 법은 멀고 주먹이 가까웠던 무법시대. 원색적인 폭력과 빈곤이 극심했지만 무능한 자유당 정부는 부정부패로 썩어 있었고 정권이 무엇인지 그 유지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헐벗고 굶주린 백성들로 만원이 된 대한민국. 그런데도 대통령, 국회의원은 왜 그리 대단했는지 천하를 호령하던 시절. 인간 존엄성과 도덕과 윤리가 부재중이다 싶은 이런 와중에서도 이 분들은 용케 살아남았다.
박정희 소장이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깡패소탕의 기치를 높이 들고 부정부패 척결 작전을 시작했을 때 우매한 국민들은 뜨거운 박수갈채를 보냈다. 선량한 백성들이 공갈, 협박, 갈취의 공포에서 차츰 해방되리란 기대에서다.
하지만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긴다고 경찰들은 깡패가 무서워 찍소리 못하면서 비겁하게도 그 한풀이를 선량한 백성들에게 풀었다.
어른들의 이야기는 여기서 그쳤다. 여행 중 손자가 전쟁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졸랐는데 할아버지는 어느새 70인생을 풀어내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지구온난화로 많이 줄어들었다는 트리프트 빙하를 구경하고 트리프트 구름다리를 건넜다. 2004년에 완공한 것으로 유럽에서 가장 높고 긴 구름다리이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서 다리 아래를 바라볼 수가 없다.
산보 내내 새들의 경쾌한 지저귐과 여기저기 알프스의 희귀한 꽃들이 우리 일행의 따뜻한 동무들이 되어 주었다. 우리는 행복한 걸음걸이로 다시 내려와서 루체른으로 향했다.
여기저기 요트들이 하얀 천사의 날개 짓처럼 돗을 펄럭이며 물놀이들을 하고 있다. 가장 깊은 곳 수심이 200m나 된다는 초록의 호수에는 이름모를 물고기들이 춤을 추고 백조와 오리들이 유유자적 수영을 즐긴다. 낚시를 하고픈 어른들의 바람을 무시하고 일행을 필라투스로 안내했다.
필라투스는 알프스의 영봉 중 해발 2132m로 비교적 낮은 봉우리에 속하지만 정상에 오르면 날씨가 맑을 땐 꽤 먼 도시들과 산봉우, 수십 개의 호수들을 바라볼 수 있는 아름다운 곳이다. 케이블카를 두 번 갈아탈 뿐 아니라 45도 각도로 절벽을 타고 오르내리는 톱니바퀴기차를 타야 도달할 수 있다.
"스위스에 거주하는 민족 중에 한인들은 소수집단. 그러니 서로가 가족처럼 기쁨, 슬픔, 근심, 걱정을 함께 나누며 정답게 살아야 한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이란 옛말을 구태여 들먹일 것도 없다. 물질주의, 개인주의를 신봉하는 서구 사회를 보면 희망이 없다. 도덕과 윤리가 없으니 모든 걸 법에 의지해야 한다. 된장, 추장, 늘, 치 없이는 못 살고 노란 피부에 찢어진 눈과 납작코에는 노랑머리보다 검은 머리가 제격이듯 우리끼리만 통할 수 있는 정, 마음, 생각과 예의범절이 아름답고 심오하며 매력적이다. 오늘 구경 잘 했다." 집으로 돌아오며 아버지가 하신 말씀이다. <저작권자 ⓒ 인터넷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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