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자치 역행, 한 고교 학생회장 선거

'표현방식 지도와 공약타당성 검토' 내세워 교사들 연설문 검열

이영일 | 기사입력 2012/11/30 [16:45]

민주·자치 역행, 한 고교 학생회장 선거

'표현방식 지도와 공약타당성 검토' 내세워 교사들 연설문 검열

이영일 | 입력 : 2012/11/30 [16:45]
11월 중순, 서울의 한 고등학교에서 학생회장 선거가 있었다. 이 선거에는 학생회가 중심이 된 선거관리위원회와 교사들로 구성된 지도위원회를 두었는데, 지도위원회는 학생회장 입후보자들의 공약을 지도, 검토하여 적절성 여부를 판단하고 선거 공약, 포스터, 소견 발표문등 선거 전반에 대한 지도위원회의 지도에 응하겠다는 입후보자들의 서약서를 받았다. 

이 선거에 학생 5명이 입후보를 했는데, 1번 후보가 투표 당일 진행된 연설 시간 서두에 지도위원회의 지도와 상관없이 발표하겠다고 공표했다. 선거 결과 이 1번 후보가 선출되고 2번 차점자가 부회장이 되었으나 나머지 3,4,5번 후보들이 1번 후보가 지도위원회의 서약서를 어겼다는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이에 대해 학생들로 구성된 선거관리위원회는 1번 후보를 서약 위반으로 당선 무효로, 차점자 2번 후보를 학생회장으로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에 대해 해당 학교의 한 교사가 선거 과정상 학교가 학생들의 선거연설문까지 제출 검열해 학생자치권을 침해했고 이로 인해 후보자들의 양심과 표현의 자유를 침해했으며 1번 후보의 경우 자신의 권리를 옹호한 행위로 불이익을 받고 있다며 필자가 속해있는 서울시교육청 학생인권위원회에 긴급구제를 요청했다. 

필자는 해당 사안을 심의하며 입후보자 5명중 누구의 의견과 행동이 옳고 그르냐를 떠나 먼저 마음이 아프지 않을 수 없었다. 첫째는 학교가 후보자들의 선거연설문등을 사실상 검열하는 그릇된 관행이 ‘교육적 지도’의 범위를 현저하게 벗어난 인권침해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학생자치권을 침해하였을뿐 아니라, 그 결과에 문제가 발생하자 이를 학생간의 분쟁으로 같은 학생들로 구성된 선거관리위원회에 그 수습을 떠넘기는듯한 책임 회피로 보였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민주주의의 산 경험이자 학생자치권 발현의 기회인 학생회장 선거를 통해 오히려 학생들이 받았을 마음의 상처가 더 아련하게 다가왔기 때문이고, 세 번째는 이 분쟁 아닌 분쟁마저 현장에서 슬기롭게 해결되었더라면 ‘선거결과 못지않은 민주주의의 참의미를 체험할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 때문이었다. 

해당 학교장은 연설문 검열이 관례적 지도의 일환이고 그 내용도 표현에 대한 변경 및 공약의 실현가능성에 대한 단순한 검토였으며 특정 학생 당선을 위한 의도는 전혀 없었다고 했다. 필자도 선생님들이 악의에 찬 마음이거나 또는 아이들을 무시하거나 해서 한 일들은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믿고 있다.
 
그러나 공들여 쓴 연설문이 지도위원회에 의해 어쨌든 수정되고 애초 표현하고자 했던 내용에 심적 제약을 받았다면 이는 분명한 학교측의 부당한 선거 개입이자 정당한 후보자들의 권리를 침해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하지만 긴급구제 결정 주문에 있어서는 매우 고뇌스러웠다. 낙선한 3~5의 후보자들은 1번 후보가 선거의 룰을 어겼기 때문에 당선 자격이 없고, 연설문 검열이 학교측의 부당한 행위라는 것을 다른 후보자들도 인지했지만 서약을 한 상태였기 때문에 준수했는데 1번 후보만 자기 권리를 지키겠다고 서약을 어기면 공정한 선거가 되지 않는다는 입장을 제출했기 때문이다. 

그 시각에서 보면 낙선한 3~5의 후보자들 입장도 나름 일리가 있다고 볼 수 있고 나름 억울한 측면이 있을 수 있음이 고민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1번 후보의 연설 내용이 당락 결과에 어떻게 작용되었는지에 대한 인과관계가 불명확하고, 당초 선거 관련 규정이 인권침해 요소가 존재하며, 1번 후보가 선거 규정에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추가 불이익까지 받아야 한다면 이는 기본적 학생인권 보호의 원칙적 철학이 깨질 수 있다는 것이 서울시교육청 인권위원들의 중론이자 필자의 의견이기도 하다. 

서울시교육청 학생인권위원회는 이 사안에 대해 장장 3시간이 넘는 토론 끝에 해당 학교에 학생자치권과 학생의 양심의 자유, 표현의 자유 등을 침해하는 학생회칙, 학생회 운영세칙, 학생회장 선거규정 등을 헌법과 국제인권조약, 서울특별시 학생인권조례에 맞게 개정하고 당선자의 권리와 의사가 침해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학생들이 공감할 수 있는 공정하고도 합리적인 해결책을 마련할 것을 권고했다. 

다행히 학교측에서는 선거과정상에 문제가 있음을 수용하고 입후보자들의 동의를 얻어 재선거를 치르기로 했다니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여전히 분쟁의 불씨는 남아있다. 

이같은 선거과정상의 학생 권리 침해가 여전히 일선 학교에서 공공연히 반복되고 있을 터이고, 어떤 것이 인권의 침해인지 부당한 권리 제약인지 교사도 학생도 정확히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다. 

적어도 고교 학생회장 선거가 청소년이 성인이 되기 직전에 경험하는 민주주의의 산 교육과정이라는 자각, 이런 식으로 학교가 선거과정에 개입하고 분쟁은 학생들끼리 처리하라는 방식이라면 입후보한 학생과 애시당초 잘못된 선거 개입과 권리 침해 절차로 자신들의 대표를 선출할 수밖에 없었던 다수의 학생 모두가 피해자라는 사실을 일선 학교에서는 상당히 “이유있는” 문제 제기로 인식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민주시민을 길러내는 인권의 핵심적 가치이기 때문이다.

경희대NGO대학원에서 NGO정책관리학을 전공했다. 대학 재학 시절 총학생회장과 문화일보 대학생 기자로 활동했고, 시민의신문에서 기자 교육을 받은 후 한겨레전문필진, 동아일보e포터, 중앙일보 사이버칼럼니스트, 한국일보 디지털특파원, 보도통신사 뉴스와이어의 전문칼럼위원등으로 필력을 펼쳤다. 참여정부 시절 서울북부지방법원 국선변호감독위원, 대통령직속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 국무총리실 삼청교육피해자보상심의위원등 다양한 민간위원을 역임했다. 2015년 사회비평칼럼집 "NGO시선"과 2019년 "일본의 학교는 어떻게 지역과 협력할까"를 출간했고 오마이뉴스 등 각종 온오프라인 언론매체에서 NGO와 청소년분야 평론가로 글을 써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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