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한국선 '허스토리' 이른건가"

광화문단상 "고액권초상 신사임당 선정... 수잔 앤서니와 화폐"

최방식 기자 | 기사입력 2007/11/05 [16:17]

"아직도 한국선 '허스토리' 이른건가"

광화문단상 "고액권초상 신사임당 선정... 수잔 앤서니와 화폐"

최방식 기자 | 입력 : 2007/11/05 [16:17]
“헌법 서문에 따르면 ‘우리 미합중국 국민은 정의를 확립하고... 후손들에게 자유의 축복을 확보하기 위해 헌법을 제정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미국 연합을 만든 모든 사람, 즉 남성은 물론 여성을 포함한 것입니다. ‘자유의 축복’ 역시 여성과 여자 후손에게도 주어져야 합니다. 여자도 사람입니까? 여자도 시민입니다? 그렇다면 여성에 대한 어떤 차별도 무효입니다.”

1863 미국여성애국동맹을 결성하고 노예제 폐지와 여성참정권운동을 이끌었던 수잔 앤서니(Susan B. Anthony)가 1872년 한 말입니다. 그해 11월 5일 치러진 대통령 선거 때 여성으로서 처음으로 투표에 참여하겠다고 시위를 벌이다가 불구속기소를 당한 뒤 전국을 순회하며 항의시위장에서 외친 소리죠.

수잔은 참정권 투쟁으로 100달러 벌금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물론 그녀는 납입 거부를 선언했고요. 검사는 추가 기소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48년이 흐른 1920년. 미국은 헌법 19조를 수정, 여성 참정권을 보장하는 ‘수잔 앤서니 수정헌법’을 만들었습니다.

‘수잔 앤서니 수정헌법’과 1달러 동전

▲ 5만원권 초상인물로 선정된 신사임당. 
여성의 평등한 참정권을 찾는 데 앞장섰던 수잔 앤서니는 다시 한 번 59년 뒤 미국인들의 관심을 끕니다. 1979년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화폐에 등장했으니까요. 1달러짜리 동전의 모델로 채택된 겁니다. 2년 뒤 바뀌고 말았습니다만 수잔이 또 한 번의 미국 여성운동 역사를 쓴 것입니다.

한국은행이 5일 한국 역사를 새로 쓴 발표를 했습니다. 2009년 상반기 발행예정인 5만원권 지폐 모델로 신사임당을 선정했다고 밝혔기 때문입니다. 고액권이 2종류가 신설되는데 10만원권에는 백범 김구 선생을 싣기로 확정했습니다.

한은은 신사임당을 선정한 이유로 우리 사회의 양성 평등의식 제고와 여성의 사회참여 긍정적으로 기여하고 문화를 중시하는 시대정신을 반영했다고 밝혔습니다. 아울러 교육과 가정의 중요성을 환기하는 효과가 기대된다고 덧붙였습니다.

한은은 고액권 초상인물 선정을 위해 올해 5월부터 각계 인사 10여명으로 화폐도안자문위를 구성하고 후보인물 20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 의견조사, 위원회논의를 거쳐 10명으로 압축했고, 다시 의견수렴, 정부측과 협의를 바탕으로 최종 2인을 확정했다고 부연설명을 했습니다.

한데, 한은은 이날 발표를 하면서 왠지 궁색한 해명을 하는 듯 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알고 보니 여성모델이 논란거리였죠. 여성계에서는 광범위하게 여성권익 향상에 앞장선 상징적 인물을 선정하라고 요구했지만 한은은 이를 무시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여성이 처음으로 화폐 모델이 된 것만이라도 고맙게 알라는 투였습니다.

양성평등과 신사임당 선정의 모순

▲ 여성계가 고액권 화폐 초상인물로 요구한 김만덕. 정조 때 여성으로 대성한 여성사업가다. 드라마 '대장금'에도 등장했다. 
당국과 협의라는 것도 알고 보니 여성가족부가 주도한 것으로 보입니다. 여성계가 요구한 양성평등 역할 모델에 대해 긍정적 여론이 일지 않자 둘 중 하나를 여성으로 관철시키고자 ‘화폐 여성할당제’를 촉구하며 당국과 여론주도층이 선호하는 신사임당을 밀었던 모양입니다.

그렇담 여성계 요구는 뭐였을까요? 화폐 모델논란이 한창이던 때 여성계 안에서는 ‘여성인물을 화폐에!’라는 단체를 만들고 5명의 모델을 추천했습니다. 한국 최초의 여성사업가이자 드라마 ‘대장금’에서 유명해진 ‘김만덕’(정조 때 인물), 독립운동으로 유명한 한국의 잔다르크 유관순, 한국 여성정치의 시조격인 신라 선덕여왕, 여성해방운동의 대모 이태영, 조선시대 페미니스트 허난설헌, 여성 독립운동가 김마리아가 주인공.

여성계는 하지만 여성인물로 가장 잘 알려진 신사임당은 제외시켰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죠. 가부장 사회가 선택한 선모양처 모델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녀가 훌륭하지 않다는 건 아니었죠. 따라서 여성가족부의 움직임에 대해 반박하며 여성들의 여론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했습니다.

하여튼 한국의 여성운동이 또 하나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요구가 모두 수용되지는 않았지만 여성이 최초로 화폐에 등장한 건 분명 성과죠. 이웃 일본서도 작년 처음으로 여성 모델이 5천엔권에 등장했습니다. 메이지시대 여류소설가 히구치 이치요죠. 프랑스에선 마리 퀴리, 이탈리아에선 의학(교육)자 몬테소리가 그 시초랍니다.

한은·여성가족부는 가부장주의 세력?

물론 한국에서 화폐에 여성이 등장한 건 처음은 아닙니다. 1962년 박정희 쿠데타 정권은 백환권에 저축통장을 들고 있는 모자상(특정 인물 아닌)을 넣었었죠. 한 달도 안 돼 없던 일로 돼버리고 말았지만 말입니다. 그 취지 또한 불손합니다. 쿠데타 뒤 정통성 없는 국자정책을 홍보할 취지로 저축을 장려하려고 한 것인데 그나마 취소된 것이었죠.

화폐는 현대인의 삶에서 없어서는 안 될 삶의 중심 중 하나입니다. 따라서 그곳에 등장하는 모델은 그 시대(나라)가 내세우고 싶어 하는 인물과 사상을 대표하는 것이죠. 한국에서는 세종대왕, 율곡, 퇴계, 학, 벼, 문화재 등이 사용됐고 여성은 없었습니다. 양성평등 사상이 크게 확산됐으니 화폐에 여성이 등장할 때가 된 건 확실하고 축하해야 마땅하겠죠.

하지만 왜 정부는 사상 처음으로 화폐에 여성을 등장시키며 여성계의 진취적 요구를 거부한 것일까요? 여성계의 요구가 지나친 것일까요? 여성가족부를 포함한 당국의 결정이 합리적인 것일까요, 아니면 권위주의를 앞세운 가부장주의에 불과한 것일까요? ‘히(He)스토리’ 뿐인 한국에서 아직도 ‘허(Her)스토리’는 이른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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