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봇대와 땡박뉴스, 그리고 언론감시

[광화문단상] 100만 어민의 죽어가는 데 전봇대 기사뿐인 언론

최방식 기자 | 기사입력 2008/01/23 [11:24]

전봇대와 땡박뉴스, 그리고 언론감시

[광화문단상] 100만 어민의 죽어가는 데 전봇대 기사뿐인 언론

최방식 기자 | 입력 : 2008/01/23 [11:24]
때 아닌 전봇대 이야기로 세상이 떠들썩합니다. 이명박 당선자가 18일 인수위 간사단회에서 한마디 한 것 때문이죠. 영암군 대불산업단지 어딘가에 전봇대가 하나 서있었답니다. 산단에 드나드는 트럭운행에 방해가 돼 관계자들이 여러 차례 관계당국에 옮겨달라고 건의를 했다는군요. 하지만 몇 년이 지나도록 시정되지 않았고 ‘지금도 서있을 것’이라고 탁상행정을 꼬집었습니다. 당선자 말이 나온 지 이틀 만에 철거됐다는 겁니다.

흘려듣기로는 속이다 시원한 소식입니다. 한나라당과 인수위에서 자랑할 만하죠. 이명박 정부의 규제철폐 행정의 단면을 예고합니다. 공무원의 탁상행정은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죠. 책임은 지려하지 않고 공만 차지하려는 복지부동은 정말이지 국민 가슴을 멍들게 하죠. 납세자 말에 귀 기울지 않는 공무원에게 일침을 놓은 이번 사건은 분명 신선합니다.

하지만 뒤를 들여다보면 그리 속 시원한 이야기가 아니랍니다. 대불산단은 1996년 조성됐습니다. 애초 자동차 부품, 전기·전자 업종을 고려해 설계됐다죠. 분양이 시원치 않아 애초 설계를 무시하고 입주 업종을 다양화했답니다. 현대미포조선 관계사들이 입주, 현재 조선관련 업체가 70%를 차지한답니다. 대형업체에 맞지 않게 설계된 다리, 도로 등 모든 게 골칫거리였던 겁니다.

탁상행정과 전시행정의 차이

설계된 도로 폭은 14미터에 불과한데 대형 선박용 블록의 경우 18미터가 확보돼야 한답니다. 길가 전봇대, 가로등, 가로수가 말썽일 수밖에요. 큰 블록을 옮기려면 전선이 걸려 2백만원을 주고 전선을 끊었다 잇는 수고를 해야 한답니다. 산단으로 통하는 7개 다리의 설계하중은 43톤인데, 2백~5백톤짜리 블록을 옮기려면 무리와 위험이 따르고요.

 
▲ 조선일보 온라인판에 올라있는 전봇대 기사와 이미지.     © 인터넷저널


대불산단의 문제는 단순한 전봇대 하나 둘의 뽑고 말 탁상행정이 아니었습니다. 애초부터 설계가 다른 것이 말썽이었죠. 지금처럼 대형 블록업체들이 입주한 상태에서 안전상의 문제를 잠재우려면 도로, 다리 등 모든 기반시설을 리모델링해야 한답니다. 그 돈이 자그마치 2600억원이나 들 것이라고 하는군요.

더 재미있는 일은 이겁니다. 당선자의 호통이 나오고 몇 시간 만에 산자부가 현지에 공무원을 급파했답니다. 관련기관과 대책회의를 거쳐 이틀 뒤 대형크레인을 동원해 문제의 전봇대 2개를 뽑았고요. 그리고 인수위에 ‘바로 처리했다’고 보고했답니다. 인수위는 이튿날 “공직사회 변화의 상징”이라고 언론에 불러줬고요.

참 잘 했습니다. 앓던 이 뽑은 기분이 이런 거겠죠? 당선자와 인수위, 그리고 한나라당에겐 참 좋은 화젯거리가 됐을테고요. 당선자에게 민원을 제기했던 이도 우쭐했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에게 즐거운 일인지는 좀 고민해봐야 합니다. 불편을 느낀 이가 누차 문제제기를 했을 때는 귀 기울이지 않다가 높은 분 한마디에 호들갑을 떠는 게 어쩐지 좀 찜찜합니다. 이런 걸 일컬어 전시행정이라 하지 않습니까?

당선자 목소리뿐인 조중동

전봇대 하나가 문제가 아닌데 호들갑을 떠는 언론은 또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습니다. 하기야, 당선자의 일거수일투족, 인수위의 한마디 한마디가 금과옥조인 이들에게 진실과 본질은 필요치 않겠지요? 뒷얘기를 다뤘던 한겨레신문이 취재능력이 좋아서 그런 게 아닙니다. 높은 분이든 보잘 것 없는 이든 호소의 옮고 그름을 가려 보도하려는 언론의 기본자세를 가졌기 때문이죠.

전봇대 소동이 벌어지던 그 시간. 기름유출로 살길이 막막해진 한 횟집 주인이 분신자살로 사망했습니다. 태안지역 어민 수천명이 삼성의 무책임과 당국의 무성의에 분노해 집회를 하던 장소에서 터진 일이죠. 그의 희생이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아흐레 전, 그리고 사흘 전 이미 2명의 어부가 음독자살을 한 뒤였으니까요.

 
▲ 대불산단 전봇대 공사중인 장면. 조선일보 온라인판 캡쳐.     © 인터넷저널

태안 앞바다에서 기름유출 사건이 터진지 한 달 반이 지났습니다. 유출된 원유로 충남의 5개 시·군 연안은 기름바다가 되고 말았죠. 그 피해는 전라도를 지나 제주까지 확산되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에 전국에서 100만명의 자원봉사자가 자기 돈을 들여 현지에 와 기름에 절은 모래밭과 바위들을 쓸고 닦고 있는 때입니다.

한데, 자치단체는 정부의 긴급지원금 300억원을 묵혀놓고 있다가 된서리를 맞고서야 동분서주합니다. 검경의 수사는 어민의 분노를 가중시키고 있습니다. 책임자에게 ‘중과실’ 결정을 안 내려 부담을 줄여줬으니까요. 피해 어민의 70%가 무허가 또는 맨손어업이어서 이들이 배상을 제대로 받을 수 있을 지도 걱정입니다.

거꾸로 가는 ‘똑같은 놈들’

어민들은 생계가 막막해 울부짖다 지쳐 목숨을 끊고 있는데도 당국의 늑장행정 고질병은 그대로입니다. 삼성 떡값을 받아 망신살을 뻗쳤던 검찰은 이번에도 가해자 편인 모양입니다. 행자부는 더 낭만적입니다. 자원봉사자 수가 100만명을 넘었으니 노벨상 후보로 추천하겠다는군요.

판국이 이럴진데, 주류언론은 죽어가는 어민 이야기에 관심이 없습니다. 삼성의 책임을 외치는 바닷가 사람들의 거센 목소리를 외면합니다. 수사결과에 분노하는 목소리도 싣지 않습니다. 오죽했으면 어민들이 삼성과 검찰, 그리고 언론을 향해 ‘똑 같은 놈들’이라 할까요. 이들 언론은 대부분의 지면에 전봇대 이야기를 실었답니다.

이명박 당선자, 그리고 인수위가 의욕적으로 일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자기 철학과 정책을 가지고 국정을 준비하고 있겠죠. 서해안 기름유출 사고는 언제든 또 생길 수 있는 일입니다. 피해자는 늘 생기겠죠? 그 때마다 약자와 서민이 더 서러울 테지요. 더큰 슬픔은 세상사가 이렇게 꼬여가는 덴 언제나 언론이 개입돼 있다는 사실일 겁니다.

전봇대 보도, 나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가십거리죠. 그 많은 지면을 할애해 호들갑을 떨 사안이 아니라는 겁니다. 사안의 본질을 제대로 보도한 것도 아니고요. 이에 비하면 100만 어민의 삶의 터전을 ‘기름바다’로 만든 기름유출사고는 중대한 이슈입니다. 책임소재와 피해 어민들의 처참한 사정을 대서특필해야 할 사안이고요. 하지만 주류 언론은 거꾸로 갔습니다.

‘찌라시세상’ 실으면 감시를
 
국민은 지금 ‘땡박언론’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대기업 광고에 목메는 ‘재벌언론’에 심기가 편치 않습니다. 독재의 나팔수였던 못된 옛 습성이 되살아나지 않을까 우려해서 그렇습니다. 강남사람들과 광고주의 이해를 앞세우는 ‘찌라시’가 판을 칠까봐서요. 자고나면 용비어천가와 관급기사 뿐인 몹쓸 세상이 될까봐서요.

더 큰 속앓이는 이게 시작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당선자의 한마디 한마디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세상이 됐습니다. 그 때마다 ‘땡박뉴스’가 또 어떤 난장판을 만들지 모르겠고요. 수없이 벌어질 ‘전봇대 소동’을 그냥 두고 볼 생각이 아니라면 서민들은 새해 다짐을 하나 더 추가해야 할 성 싶습니다. ‘땡박언론’에 눈을 부릅뜨겠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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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슬픈자 2008/01/23 [17:08] 수정 | 삭제
  • 정말 대단합니다. 이명박. 전봇대 뽑는 솜씨. 해외토픽깜입니다.
    대운하도 순식간에 뚫어버릴 것 같은 기센데... 큰일입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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