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왕 암살' 이봉창 의사 순국 전 사진 발견

윤주 매헌기념관장, 독립운동자료 수집중 당시 아사히신문 자료...

서울의소리 | 기사입력 2014/10/05 [11:52]

'일왕 암살' 이봉창 의사 순국 전 사진 발견

윤주 매헌기념관장, 독립운동자료 수집중 당시 아사히신문 자료...

서울의소리 | 입력 : 2014/10/05 [11:52]

 
 
히로히토 일왕 암살을 시도했던 이봉창(1900~1932) 의사의 순국 전 사진이 발견됐다.

윤주 매헌기념관장은 독립운동 관련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1932년 9월30일자 아사히신문 호외에 실린 이 의사의 사진을 발견했다며 3일 이를 공개했다. 사진 속 이봉창 의사는 볼이 깊이 팬 수척한 모습이다. 사진 오른쪽에는 대역범인 이봉창(위) 그의 생가(오른쪽 아래)와 도쿄의 숙박부에서 확인한 필적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이봉창, 윤봉길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이봉창 의사가 순국한 1932년 10월 10일, 이봉창 의사는 32세의 꽃다운 나이에 형장의 이슬로 순국하였습니다. 

  
이 의사는 1932년 1월8일 일본 도쿄 경시청 앞을 지나가는 히로히토(裕仁) 일왕 일행에게 폭탄을 던졌으나 맞히지 못하고 현장에서 체포돼 그해 10월10일 사형당했다.이 의사는 1932년 1월8일 일본 도쿄 경시청 앞에서 히로히토 일왕 행렬을 향해 수류탄을 던졌다. 말이 다치고 궁내대신의 마차가 뒤집혔을 뿐 암살에는 실패했다. 도쿄 형무소에 수감된 이 의사는 9월30일 일본 도쿄 법원에서 열린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번에 공개된 사진은 아사히신문이 이날 발행한 호외에 실렸던 것이다. 이 의사는 열흘 후인 10월10일 교수형을 당했다. 그의 나이 불과 32세였다.

서울 용산에서 태어난 이봉창 의사는 어린 시절 일본인이 경영하는 제과점에서 일하다 주인으로부터 학대를 받고 만주의 남만 철도회사에서 운전 견습을 할 때도 조센진이라는 모욕적 발언을 들었다. 그는 적을 이기기 위해선 적을 알아야 한다는 결심을 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어를 익히고 여러 직업을 거치면서 일본을 파악했다.
 
1931년 1월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백범을 만났을 때 청년 이봉창은 상하이 소재 일본인 인쇄소 점원이었다. 그는 백범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제부터 영원한 쾌락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로 상하이로 온 것입니다. 저로 하여금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성업(聖業)을 완수하게 해주십시오."

거사 준비에는 1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1931년 12월13일 백범은 이 의사를 안중근 의사의 동생인 안공근의 집으로 데려가 성공을 다짐하는 선서식을 거행했다. 선서 후 이 의사는 수류탄을 양 손에 들고 기념 촬영을 했다.

거사는 실패했으나 그의 의거는 항일독립투쟁 전선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순국 당시 미혼이었던 이 의사의 유해는 해방 후인 1946년 5월15일 국내로 봉환돼 7월6일 국민장으로 효창원에 안장됐다. 

<의거 후 체포당한 이봉창 의사>
  
거사가 일어나자 일제 경찰은 무관한 일본인을 범인으로 알고 구타했으나, 무고한 시민이 다치는 것을 원하지 않은 의사은 스스로 “내가 한 일”이라고 자백하고 일제에 체포됩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봉창 의사를 지원한 일로 외부 후원이 끊겨 곤경에 처했습니다. 그러나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홍커우 공원 의거 이후 중국 국민당의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됩니다. 
 
이봉창 의사는 1932년 9월 30일에 사형을 선고 받고, 10월 10일에 처형당합니다. 이후 광복 후인 1946년 유해가 조국으로 돌아와 윤봉길 의사, 백정기 의사와 함께 효창원의 삼의사 묘역에 안장되었습니다. 나라를 위해 제 한 목숨 아끼지 않고 의연하게 독립운동을 했던 이봉창 의사를 가슴 깊이 간직해야 할 것입니다. 

 
글쓴이-명수

원본 기사 보기:서울의소리
  • 도배방지 이미지

이봉창 순국 전 사진 관련기사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