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성가퀴 양지녘에 오랑캐꽃?

[포토에세이-下] 고즈넉한 산성 혁명군 향연에 취한 봄날오후

최방식 기자 | 기사입력 2009/04/06 [13:31]

병자호란 성가퀴 양지녘에 오랑캐꽃?

[포토에세이-下] 고즈넉한 산성 혁명군 향연에 취한 봄날오후

최방식 기자 | 입력 : 2009/04/06 [13:31]
<지난 글 이어> 오리나무 군락지를 지나 구릉 너무 살짝 연주옹성이 넘겨다보이는 곳에서 잠시 쉬었습니다. 일행 중 한명이 정성껏 싸온 원두향을 즐길 시간입니다. 커피 브레이크죠. 녹색전사는 과일과 계란을 꺼내고요. 숲속 진수성찬입니다.

이 맘 때쯤입니다. 벚꽃이 활짝 핀 아련한 봄날이죠. 찐 계란 몇 개와 도시락 하나 들고 동무들과 손잡고 소풍을 갔던 때가요. 왜 그리 시간은 더디 가던 지요. 일 년에 딱 두 번 누리는 호사에 맛난 걸 어서 먹고 싶은데...

초봄에 먹으려고 소금을 잔득 넣어 절인 ‘짠 김치’에 물렸거든요. 너무 짜 씻고 양념을 넣어 다시 무친 건데 그래도 짭니다. 춘궁기를 넘기는 지혜였지요. 한 줌만 있어도 반찬을 해결할 수 있으니까요. 누군가 계란이라도 싸오면 정말 부러웠지요.
 
봄바람에 죽은 노인인가?
 
능선길입니다. 숲 속 혁명군들의 회합을 시샘이라도 하는지 날씨가 조금은 매섭습니다. 폐인들이 벌써 ‘봄바람에 죽은 노인’도 아닐 텐데, 동풍은 제법 쌀쌀맞게 불어옵니다. 왜, 봄바람을 첩의 죽은 귀신아라고 한다잖아요? 여우의 눈물을 흘리게도 하고요.

 
▲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습니다. 녹색전사가 '괭이눈'이라고 부른듯 한데 잘 모르겠습니다. 이토록 예쁜자태를 왜 숨기는 걸까요? 폐인들이 못 보는 걸까요?     © 최방식 기자
▲ 근육이 요란하죠? 그래서 별명이 근육질 나무라네요. 본명은 들었는데 잊었습니다. 취재수첩을 빼놓은 넋나간 기자는 잿밥에만 눈길을 뒀으니...     © 최방식 기자
▲ '그리워도 뒤돌아 보지말자/ 작업장 언덕길에 핀 꽃다지/ 나 오늘밤 캄캄한 창살아래/ 봄 뒤척일 힘조차 없어라/ 아 진정 그리움이 무언지/ 사랑이 무언지...' 그 꽃다지입니다.     © 최방식 기자

 
탁 트인 길 어디에선가 숲 해설사가 한마디 던집니다. “왜 망원렌즈 안 꺼내세요? 저게 연주옹성이에요. 수십 번을 올랐다더니 연주봉을 모르세요? 남한산성에 와서 뭘 본거예요?” 녹색전사가 가학성인가? 아닌 이가 또 어디 있겠어?

겨우내 청량산을 올라 다녔는데, 폐인들은 ‘3번 등산로’만 다닌 겁니다. 2번, 4번 길도 안 간 건 아닌데, 연주봉 옹성에는 와보지를 않았으니 헛것을 보고 다녔나요? 잿밥에만 관심 있었거나? 서문 안쪽 동동주 마시는 데까지만 왔다 돌아가곤 했거든요.

옹성의 성가퀴(女墻) 위로 멀리 내려다보이는 서울이 회색으로 고즈넉합니다. 발 뿌리에는 제비꽃이 곱게 피었습니다. 노랑, 하양, 빨강 가지각색이 있다 든데 오늘 만난 녀석은 보라색입니다. 신비스럽게 무장한 것이죠. 병자호란의 격전지에 오랑캐꽃이라?

옹성 쪽 암문(쪽문)을 통과해 산성 안으로 들어가니, 혁명수비대가 버거워 할 정돕니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들로 꽉 찼군요. 산성 안 분지 중앙엔 도심격인 종로거리가 있습니다. 길가 들꽃의 향연은 계속됩니다. 별꽃, 꽃다지... 아는 만큼 보인다더니...
 
 
▲ 산성 어디엔가 모여 피는 희귀종 '노루귀'입니다. 금방이라도 놀라 펄쩍 뛰어 도망갈 듯 가만히 적정을 살피는 녀석의 앙증맞은 귀 같죠?     © 최방식 기자
▲ 눈여겨 들여다보면 혁명군의 모습은 가지각색입니다. 새 순인지 꽃 봉우린지 꼭 돼지발톱을 닮았습니다.     © 최방식 기자
▲ 산성 어딘가의 하늘이 방울로 가득합니다. 가톨릭 순교자 터쯤 될 겁니다. '폭탄'이라 불렀던 플라타너스 열매가 하늘에 멋진 그림을 그렸습니다.     © 최방식 기자

아는 만큼만 보인다더니...
 
배가 그리 고픈 건 아니지만,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칠 리 없습니다. 산성에 오면 늘 가던 곳이죠. 오후 2시가 다 돼 가는데 손두붓집엔 자리가 남아있질 않습니다. 멋쩍긴 하지만 식당 한 가운데 줄을 서야 합니다. 딴 집으로 가든지. 맛 좋은 손두부를 먹든지.

술자리에선 가끔 식탁 위 안주보다 더 맛난 게 있지요? 조롱거리입니다. 씹는 맛이 보통이 아니거든요. 이날 최고 안주는 일행 중 한명의 식습관입니다. 밥에 생된장과 올리브유를 비벼 먹는다나요. 이역만리서 혼자 살며 얻은 식습관이라네요. 그 맛이 괜찮을까요?

산성이 곧 비틀거릴지도 모를 거란 생각에 자리를 차고 일어섰습니다. 녹색전사가 보여줄 게 있다기에요. ‘노루귀’ 군락지가 있답니다. 한창 혁명기운을 고조시키고 있을 것이라면서요. 정확한 위치는 언급하지 말랍니다. 구경꾼들 몰려와 사고 칠까 봐 그런 거죠.

30여분 걸었을까요. 두 명의 카메라맨이 납작 엎드려 접사 중입니다. 장비가 보통 아닙니다. 녹색전사 또 한 말씀 합니다. “노루귀가 왜 저리 키가 작은 줄 아세요. 고개도 꼿꼿이 들지 않고 조금 숙인 건 또 왜 그런 줄 아십니까?”

 
▲ 산성 중앙로 길가 벽돌 틈새에 피어난 별꽃. 폐인 눈엔 띄지도 않는 꽃입니다. 너무 예뻐 고혹한 자태를 보여주기 싫어 눈에 잘 띄지 않는 걸까요?     © 최방식 기자
▲ 앉은 부채입니다. 별명은 '앉은 부처'고요. 모자를 벗기니 동자승이 정갈하게 가부좌를 틀었습니다. 산성 어딘가에 수두룩하게 피어나 혁명의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 최방식 기자
▲ 연꽃이 사라진 연못은 그림자 꽃을 예쁘게 피워냅니다. 행인도, 기운 배도 모두가 아름다운 수채화죠. 늘 아련하게...     © 최방식 기자
 
폐인은 짐짓 망원렌즈를 꺼냅니다. 납작 엎드리지 않아도 찍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면서요. 하지만 꽃잎도 ‘허니가이드’도 눈에 들어오질 않습니다. 결국 엎드렸습니다. 숲 해설사 한마디 이어집니다. “바로 그 자세가 답이죠. 노루귀가 ‘날 보려거든 낮아지라’고 하는 거죠.”
 
“날 보려거든 몸을 낮춰요”
 
“여기도 있어요. 저기도. 또 여기도.” 일행 중 한 명이 신났습니다. 여기저기 노루귀를 가리킵니다. 나무뿌리, 바위, 돌 틈 황량한 곳에 무기를 꺼내 들고 도열해 있습니다. 하얀색부터 청보라, 진보라까지 가지각색입니다. 잔털에 싸인 고혹한 꽃잎은 숨을 멎게 합니다.

눈에 띄는 게 노루귀뿐이 아닙니다. 초록의 귀를 빠끔히 내민 ‘앉은 부채’(일명 앉은 부처)가 가부좌를 하고 있습니다. 땅속 아지트에서 창끝은 조금 내밀고 대기 중 명령이 떨어지면 금방이라도 땅 위로 튀어오를 듯한 기셉니다. 풀잎을 제치니 여지없는 동자승입니다. 해가 떨어져 하늘을 닫은 채요.

조금 더 숲 속으로 들어갔을 겁니다. 멋들어지게 핀 노루귀 세 송이와 주변 이끼가 오묘한 조홥니다. 렌즈를 고쳐 잡는데 어느 틈에 다가왔는지 낯선 카메라맨이 한마디 합니다. “저런 나쁜 놈들, 저건 범죄야.” 작품사진 찍겠다고 누군가 이끼를 얹혀놓은 거라네요.

 
▲ 산성 혁명군을 지키는 성곽은 이끼들의 화폭입니다. 제 삶이건만 폐인눈엔 그림입니다. 확실히 취한 것이지요? 혁명군의 향연 아니면 동동주에?     © 최방식 기자
▲ 병자호란의 격전지에 피어난 오랑캐꽃. 참 묘한 인연이지요? 그날을 기억하는 것일까요? 이녀석은 적이 아닙니다. 적들이 쳐들어 오는 때를 알려주는 메신저라고나 할까요?     © 최방식 기자
▲ 산성의 봄은 여러 모습을 연출합니다. 꽃들의 향연이 계속되나 싶더니 또 한 쪽은 눈꽃을 피웠습니다. 노랗게 연두색으로 피어오르는 새싹들을 시샘하는 것이지요. 망원렌즈엔 그저 고운 화폭일 뿐입니다.     © 최방식 기자

 
폐인들은 성남으로 내려가기로 돼 있었습니다. 봉국사 효림 스님이 보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스님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출타를 해야 한다면서요. ‘노루귀’와의 접선은 그 때문이죠. 하지만 좀 늦게 온 모양입니다. 키 작은 미녀 혁명군들은 하나 둘 문을 닫고 저녁준비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혁명군의 향연에 취한 겁니다. 동동주에 미혹됐나요? 요한 시트라우스의 행진곡이 제법 힘찼을 겁니다. 소총을 잃은 혁명군을 따라 숲을 얼마나 헤맸는지 모릅니다. 깨어보니 취재수첩을 꼭 껴안고 있었을 뿐입니다. 녹색 전사의 말을 기록하려고 그랬을까요?
평화를 사랑하는 최방식 기자의 길거리통신. 광장에서 쏘는 현장 보도. 그리고 가슴 따뜻한 시선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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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랍비 2009/04/11 [11:53] 수정 | 삭제
  • 세 가지를 넣고 비비니 맛이 나더군요. 거기에 사이다까지 곁들여서 어제 저녁을 먹었답니다.
  • 평화사랑 2009/04/10 [00:54] 수정 | 삭제
  • 궁금해요. 고소한 지중해식 뭔가가 나오지 않을까 싶은데...
  • 자미 2009/04/09 [22:03] 수정 | 삭제
  • 올리브 기름에 된장을 팍팍 비벼서...ㅎㅎㅎ
    디저트는 그 향기로운 커피로 느끼함을 달래고.^^!
    18일에도 커피 맛볼 수 있는 거쥬?(속닥속닥)
    어느 꿈같은 봄날이습니다.
    봄빛에 어우러진 숲 속 혁명군들도 수채화도 녹색여인도 폐인님들도 글맵씨두 모두 조화로워요. 코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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