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마재비, 숲속 춘정에 풍덩 빠지다[포토에세이] 남한산성 산벚꽃에 취해 밤 깊은 줄 모르고...숲은 공존입니다. 어떤 발걸음도 거부하지 않습니다. 떠나는 이를 붙잡지도 않지요. 하늘, 땅, 바람, 곤충, 식물, 물, 공기... 어울렁 더울렁 살아가는 마치 재래시장 같은 곳입니다. 마냥 싱그럽죠. 생명을 지키는 연합군으로서. 거기 늘 평화가 깃든 까닭이죠. 그 숲과 통정했습니다.
‘버마재비’가 지난 주말 나들이를 했습니다. 녹색 혁명군이 진주하는 남한산성에 화려한 외출을 했죠. 신림동과 종로의 지하실을 시계불알처럼 오갔는데, 신세가 조금 편 셈입니다. 행보는 뜬금없지만 뜻은 갸륵했죠. 연합군이 돼 보겠다는 거니까요. 숲 속 평화도 만끽하고요. 버마재비는 버마를 사랑하는 작가들의 모임의 학습 동아리입니다. 회원들 신작 시평을 할 때가 대부분입니다. 시문학을 공부하기도 하지요. 요즘엔 장자에서, 노자, 그리고 데리다까지 갔습니다. 오지랖이 넓기도 하죠? 창작의 밑거름을 삼는다니 황당해 할 것까지는 없습니다.
버마재비의 외출은 때가 절묘했습니다. 산성 숲 속 산벚꽃을 마지막 볼 기회였다면 믿으실까? 박민규 시인이 그랬을 겁니다. “정말 흐드러지게 피었네.” 화무십일홍을 이야기하며 모두가 궁금해 했죠. 숲 해설사는 길어야 사흘이라 했습니다. 이틀 뒤 비가 주룩주룩 내렸습니다. 망원렌즈를 들고 산성 숲을 톺은 기자는 얼마나 대견했겠습니까? 이튿날 하루 종일 쏟아지는 비를 보면서... 산벚꽃부터, 꽃다지, 여러 제비꽃, 금붓꽃, 앵두꽃, 현호색, 병꽃, 양지꽃, 개별꽃 등 가지각색의 숲속 섹시 미녀들의 멋들어진 유혹 자태들을 담아뒀으니까요. “숲은 공존, 거긴 늘 평화” 황홀한 구애의 시간, 종족 번식의 본능인 성기를 뽐내는 것이니 그 숲에서 어찌 벌·나비만 홀렸겠나이까. 잡새도 폐인도 다 숲의 관능미는 알아보니까요. 하지만 입으론, 꽃보다 생명이지요. 예쁜 여인을 슬쩍 훔쳐보고도 짐짓 못 본 척 하는 그런 태도라고나 할까요? 나른한 주말 오후의 미혹은 성불사에서 시작했습니다. 여느 ‘부처가 되는 절’이 아닙니다. ‘별 위에 모자를 쓴’ 불사지요. 그런 한자는 처음 봤는데, 조어 아닌가 싶습니다. 절 뒤편은 제법 넓습니다. 산행 이정표 앞에 선 ‘녹색전사’ 정미경님의 목소리가 제법 우렁찹니다. 여남은 이가 모였는데 지나는 이들이 한 둘 기웃거립니다.
등산로는 산성 연합군이 자랑하는 평화의 숲이 자리한 ‘1번국도’. 마천에서 남한산성(청량산)을 타고 넘는 가장 긴 노정입니다. 기자가 녹색전사를 따라 한 번 오른 뒤부터 늘 따르는 노선입니다. 가장 왼쪽에 있어 좌익노선이기도 하지요. 청량산 왼쪽 날개이기도 하고요. 몇 발짝 뛰기도 전에 낙오자가 생겼습니다. 숲이 편치 않은 것일까요? 숲과 친할 줄을 몰라서 그런 것이겠지요? 뭇 생명과 어우러진 평화를 이웃하는 게 싫은 건 아닐 테니까요. 또 한명은 심심할까봐 동무하려고 그런다나요? 이웃사랑이 진하기도 합니다. 숲 어귀에서 갑작스런 이별을 하고 돌아서는데 숲 해설사의 소집령입니다. 동그랗게 서라는 군요. 놀이를 하겠다는 건데 다들 어정쩡한 태도입니다. 뒷짐 진 손에 열매 하나씩 쥐어주고 눈을 감은 채 손 감각으로만 같은 열매를 가진 짝을 찾으랍니다. 도토리, 밤을 찾아... “황홀한 구애, 육감에 홀려...” 일행 중 한명이 ‘짝짓기’라고 했다가 구설수에 올랐습니다. 그게, 말하기가 좀 ‘거시기’한 거지만, 교미라는 애초 뜻을 왜곡한 거니까요. 둘씩 짝을 이루도록 한 걸 그리 부른 것인데, 사실 그 말이 그 말 아니겠습니까? 놀리려고 한 괜한 면박이었던 셈이죠.
늘 은밀한 숲이었건만 낯선 이에게도 경계를 허물었습니다. 조바심에 그런 줄도 모르는 이가 있었지만요. 먼저 풀어 젖히면 벌써 평화이고 하나입니다. 덜 익숙하거나 낯섦도 잠깐입니다. 깊은 숨에 한 아름 팔 벌리면 그만이죠. 그러니 도토리를 쥔 손은 구애인 것입니다. 인간을 뺀 자연은 수컷이 아름답답니다. 꿩을 보면 알 수 있듯이요. 식물도 그렇다는 군요. 암수 같이 피는 꽃을 봐도 확연하고요. 왜 인간만 거꾸로 됐을까요? 그래서 자연을 파괴하고 뒤바꾸려 드는 것인가요? 제 모습과 다른 게 시기질투 나서요. 인조와 자연이 대조인 것도 그렇고. 긴 가뭄에 숲이 목이 마른 모양입니다. 봄의 향연을 준비하기에 물이 턱없이 모자란 것이지요. 여남은 이가 살금살금 지나가는 데도 먼지가 풀풀 피어오릅니다. 허구한 날 짓밟히는 뿌리들은 참 고생도 많습니다. 손님을 반겨야 하니 생고생을 마다하지 않는 것이겠지만요? 숲 속에서는 바위도 넉넉합니다. 쉼터가 되고 중추가 돼 숲생을 지키니까요. 넓디넓은 게 오솔길 한 곳을 차지하고 앉아 딱 걸터앉기 좋은 모양입니다. 한 명이 “이걸 너럭바위라고 한다”고 했나요. 목마른 이가 화답합니다. “저 위에서 막걸리 먹기가 참 좋지요.”
“은밀한 숲 조바심도 사라지고” 김자흔 시인은 해설사와 함께하는 숲 탐험이 처음이 아닌 모양입니다. 녹색전사에게 확대경(룩배)을 주문하더니 등산 내내 식생에 그 걸 들이댑니다. 눈에 잘 안 띄는 미생의 세계를 보려는 것이지요. 기자도 사실 제 눈으로만 숲을 본 건 아닙니다. 망원렌즈의 도움을 받았으니까요. 숲은 감추지 않습니다. 그러니 모두는 제각각의 눈으로 숲을 보는 것이지요. 봉우리에 선 이는 전체를 보고, 뿌리를 딛고 선이는 잎사귀를 봅니다. 너럭바위에 걸터앉은 이는 정겨운 이웃을 보고요. ‘룩배’를 든 이 발걸음이 10배나 느려질 수밖에 없는 이유이지요. ‘오리 숲’을 지나면 능선길입니다. 제법 시원하지요. 송파골 바람이 하남으로 넘는 곳이니까요. 거기 어딘가에 막걸리 장수가 서 있습니다. 앞서 연주봉 옹성 곁에서 봤던 이입니다. 단속을 피해 내려온 것일까요? 아님 경쟁이 심해서? 목구멍이 포도청일 테니... ‘랍비’가 맛 좋은 커피향을 꺼내드는 곳인데 아쉽습니다. 식구가 많아 출발도 전에 다 먹어버렸답니다. 맹물 한 모금 축이고 다시 길을 나섰지요. 재 너머 머잖은 데 있을 한 잔을 생각하면서요. 어른 시인께서 떡을 노나 줘 두어 점씩 먹고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연주봉 옹성은 별천집니다. 이골저골 화려한 춘정을 만끽했죠. 시원한 바람, 탁트인 풍광, 거기가 그냥 천상입니다. 한데, 멀리 하남 쪽이 연기로 가득 덮였습니다. 큰 산봉우리 하나가 불에 휩싸였습니다. 휴대전화 송화음이 채 덜 끝났는데 헬기가 오가는 게 보입니다. 춘심에 겨워 막걸리는 절창... 산성마을로 내려가는 길은 꽃의 향연이 황홀합니다. 금붓꽃이 화려한 자태를 뽐냅니다. 곁엔 동고비가 춘심에 홀렸는지 날갯짓을 멈췄습니다. 상가 곳곳은 여드레째 꽃향기를 즐기는 이들로 꽉 찼습니다. 남한산성 첫 ‘등문화제’를 한 것이었습니다. 가는 날이 장날인 게죠. 폐인들이 지나치지 못하는 손두붓집. 버마재비도 참새가 됐습니다. 봄나들이 춘심에 겨워. 그러니 공부는 좀 미루기로 했습니다. 숲 어귀에서 발길을 돌렸던 두 시인도 합류했습니다. 나들이에 함께하지 못했던 박광배 시인도 뒤늦게 찾아왔군요. 막걸리 참에, 절묘하게요. 막걸리 한잔, 손두부 한입. 시 한 수 튀어 나올 분위깁니다. 김이하 시인은 너털웃음 그 자체가 멋진 절창입니다. 늘 다소곳한 박윤일 시인의 얼굴에도 봄 시 한 수가 떠올랐습니다. 버마재비의 ‘쓰리박’ 박설희·박홍점 시인은 두부 맛 좋다고 엄지를 치켜듭니다.
취흥에 날 저무는 줄도 몰랐지요. 서둘러 밖으로 나오는데, 아차 실수입니다. 등축제가 막 끝난 겁니다. 산성축제를 놓치고 말았으니 아쉬울 밖에요. 사라져가는 연등행렬을 보며 하산길에 올랐습니다. 그냥 성남행 9번 버스에 오르면 되는 거지요. 그렇게 어정쩡하게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성남에서 녹색전사와 폐인 둘이 버스를 옮겨 타려고 먼저 내렸다가 ‘한잔 더’를 떠올려 손을 치켜드는 데 늦었습니다. 버스는 배기가스를 내뿜으며 힘차게 출발합니다. 어쩝니까. 셋이서 여흥에 빠져 밤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그만... <저작권자 ⓒ 인터넷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평화를 사랑하는 최방식 기자의 길거리통신. 광장에서 쏘는 현장 보도. 그리고 가슴 따뜻한 시선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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