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스타일’ 얼간이 눈에 들어온 ‘소’

18.6km 서울성곽길 문화역사여행② 혜화문~북악산~창의문

최방식 기자 | 기사입력 2012/08/09 [17:47]

‘서울스타일’ 얼간이 눈에 들어온 ‘소’

18.6km 서울성곽길 문화역사여행② 혜화문~북악산~창의문

최방식 기자 | 입력 : 2012/08/09 [17:47]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성냄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긴장감이 떨어졌을까요? 아닐 겁니다. 성곽여행 두 번째이니 조금은 나아지는 것이겠지요? 늘 노심초사하고 학수고대하지만 이루지도 얻지도 못하는 도시인들. 인성마저 잃고 탐욕으로 똘똘 뭉친 서울족. 문뜩 나옹선사의 시 한 수가 새삼스럽습니다. 깨달음이 없진 않았던 모양입니다.

약관의 나이에 겪은 친구 죽음. 어른들에게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가느냐” 물어도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 답을 찾아 회암사에서 머리를 깎고 수도를 시작한 고려 말 고승 나옹선사. 연경 유학길에 태조의 스승 무학대사를 제자로 거둔 그가 깨달음을 표현한 시입니다. 좋은 말이라고만 여겼는데, 성곽여행 중 문뜩 크게 다가옵니다.

‘서울족’ 깨달음여행 성북동에서

무학대사가 정도전과 함께 6백 년 전 설계하고 건축한 한양도성. 그 안(또는 주변)에 살면서도 왜 그 땅에 그토록 오랜 세월 사람들이 터를 잡고 사는지, 사고무친의 땅에 한번 살아보겠다고 부모와 일가친척·고향을 버리고 무작정 헤집고 들어와 “난 서울스타일”을 외치며 ‘성공시대’를 고대하는 얼간이 눈에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소’가 보인 겁니다.
 
▲ 두 번째 서울성곽여행입니다. 늘 노심초사하고 학수고대하지만 이루지도 얻지도 못하는 도시인들. 인성마저 잃고 탐욕으로 똘똘 뭉친 ‘서울족’이 나와 이웃, 그리고 내 고을을 알아보려고 길을 나섰습니다.     © 서문원



서울성곽여행 두 번째 시작은 지난 28일 혜화문. 임진왜란 때 태워버리고, 것도 모자라 강점기 때 헐러버린 비운의 한양도성 동소문. 제 자리도 아니고 제 몸체도 아닌 모조 문 섬돌에 여행자 아홉이 모여 앉았습니다. 마치 자신들의 여행이 불교에서 도를 찾아 떠나는 ‘심우’(尋牛) 같다며 여정을 나섰습니다.

우연만은 아닐 겁니다. 숙정문 가는 길 성 밖 성북동 기슭에 만해 선사가 생전 마지막 10여년을 기거했던 ‘심우장’(尋牛莊)이 있습니다. 구도자가 소(도, 깨달음)를 찾아 헤매다가 소를 발견하고 붙들어 등에 올라타고 집으로 데려오죠. 하지만 소도 집도 아닌(사라진) ‘득도’의 경지에 오르는 ‘심우10도’(소를 찾는 10개 과정). 그 도량에서 ‘성불’한 만해의 길에 우리 여행자도 들어선 겁니다.

혜화문을 돌아 서울시장 공관. 한양도성이 사택 기단으로 쓰인 현장을 보며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한양도성을 깔아뭉개고 그 위에 집을 지은 일본인. 풍광이 좋고 잘 지어졌다고 대법원장에 이어 서울시장 사택으로 사용하는 이 땅의 공직자들. 그런 사실조차 모르는 무수한 사람들 모두에게...

숭고한 마음도 잠시. 여행자들은 몇 발자국도 안 가 배부터 채우겠다고 음식점에 들렀습니다. 와룡공원을 통과하면 창의문까지 길게는 3시간여 먹을 데가 없다는 게 핑계였습니다. “벌써 먹냐”는 이도 있었지만, 일행은 거기 꽤 이름이 알려진 ‘마전터’(음식점)에 들렀습니다.

▲ 6백 년의 한양도성. 그 안(주변)에 살면서도 제 터전을 잘 모르는 이들. 사고무친의 거대도시에 한번 살아보겠다고 일가친척과 고향을 버리고 무작정 상경해 “난 서울스타일”을 외치며 ‘성공시대’를 소리 높여 외쳐대는 얼간이 눈에 깨달음의 ‘소’가 보이려나?     ©최방식


음식을 고르는데 한쪽에서 “오늘이 중복” 소리가 터져 나왔고, 일부가 보양추어탕을 시켰습니다. 나머지는 보리비빔밥을 시키고, 막걸리도 한잔씩을 곁들였습니다. 마(麻, 섬유)를 삶거나 빨아 볕에 말려서 희게 하는 일(궁궐에 납품)을 하던 마전터가 성북동의 옛 이름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죠.

“중복” 소리에 추어탕 시켜놓고

용이 누워있는 지형이라는 와룡공원. 땡볕을 정면으로 맞으며 ‘말바위’ 쉼터에 오른 여행자들은 거기 길을 막고 신분증을 검사하고 통행신청서를 제출토록 한 권부의 횡포에 짜증스러울 만도 하건만, 그날만큼은 좀 달랐습니다. 더위에 지쳐 숨넘어갈 듯 한 여행자들에게 시원한 공기(에어컨)의 쉼터 사무실이 천국이었기 때문.

10여분 떠들고 놀다 다시 오르려는데 프랑스인 다비드가 자긴 내려가 차로 이동해 종착지인 창의문에 가서 기다리겠다고 합니다. 농담인줄 알았는데, 심장에 무리가 갈 성 싶어 그런다며 거기서 보자고 합니다. 그냥 집에 가려나 싶었는데 “꼭 창의문에서 보자”고 합니다.

▲ 음식점 마전터. 중복이라며 몇이 보양추어탕을 시켰습니다. 보리비빔밥에 막걸리를 주문하는 이도 있고. 마(麻, 섬유)를 삶거나 빨아 볕에 말려서 희게 하는 일(궁궐에 납품)을 하던 마전터가 성북동의 옛 이름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죠.     © 서문원


다시 ‘땀 목욕’을 하며 가파른 북악산을 오릅니다. 말바위 쉼터가 해발 100여미터는 될 터이니, 나머지 150여 미터만 오르면 되는데 그게 그리 쉽지가 않습니다. 가파른 북악 능선을 따라 이리저리 꼬불꼬불(곡장, 방어에 유리하도록 한 한국 산성의 특징)한 성곽을 따라 한발두발 오르고 또 오릅니다.

가는 곳 마다 청와대 외곽경비 군인들. 그들은 여행자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무언가를 꺼내면 눈초리가 매섭습니다. 일행 중 한 여성분은 두어 차례 휴대전화 영상을 검색 당했습니다. 청와대 쪽 사진을 찍지 못하도록 하는 등 보안 때문인 모양인데, 왜 그 분만 거듭 검색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조성왕조 200여년 법궁이었던 경복궁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청운대. 다시 구불구불 10여분 올라 마침내 서울이 한눈에 들어오는 북악산(백악산) 정상. 역시 군인 서너명이 감시하고 있습니다. 너무 덥고 힘들어 한쪽 나무 그늘에 앉아 가져온 음식을 나누며 잠시 수다를 떨었습니다.

북악산에서 본 서울은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정면의 남산과 좌청룡우백호의 보호 속에 아늑하게 자리한 내가 사는 도시. 나와 가족, 그리고 이웃이 먹고 사는 그토록 포근한 서울을 처음 마주했습니다. 인구 10만 명도 안 되던 도성이 1천만명이 넘는 거대도시로 바뀌어 거주자의 몰개성을 강요하는 시스템폭력이 무서울 정돕니다.

▲ 가파른 북악 능선을 따라 이리저리 꼬불꼬불(곡장, 방어에 유리하도록 한 한국 산성의 특징)한 성곽을 따라 한발두발 오르고 또 오릅니다.     ©최방식


내가 사는 도시, 그 아늑함에...

내사산(內四山)을 이은 19km의 한양도성. 왕권을 강화하고 백성의 안위를 지키려고 축조한 성. 그 근본인 주산(백악산) 꼭대기에 올라 느낀 건 경외였습니다. 인간의 유한함, 그 생명을 지키겠다고 지은 도성만 덩그러니 남은 세월, 조금 더 빨리 움켜쥐겠다고 이웃을 적대시해온 무한경쟁을 반추하며... 산을 내려가거든 상처받은 이들을 따뜻하게 안아줘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40여분 이어지는 하산 길. 부암동이 한눈에 내려다봬 풍광은 시원했지만, 가파른 경사에 살을 태우는 따가운 햇볕과 줄줄 흐르는 땀방울과의 씨름은 고행이었습니다. ‘이렇게 내려올 거면서 왜 그토록 힘들게 올라가냐’는 푸념도 들립니다. 깨달음을 못 찾는다면 천부당만부당한 소리. 30억 원 복권에 당첨돼 세상 모든 걸 얻은 줄 알았던 이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이 들리던데...

마침내 여행자들은 창의문에 도착했습니다. 광해군을 질시해 반역을 꾀했던 능양군(인조)과 반정 무리 7백여명이 병장기를 꼬나쥐고 도성에 진입한 곳도 바로 여기. 문루 안에 반정 주도(공신)세력의 명단이 있다기에 그 걸 확인하려고 들어서다 경고음이 울려 포기했습니다. 길은 열려있는데 전자 경고소리를 듣고 출입금지 구역임을 알아차렸습니다.

▲ 마주한 남산과 좌청룡우백호의 보호에 아늑하게 자리한 내가 사는 도시. 나와 가족, 그리고 이웃이 살아가는 포근한 서울을 처음 마주했습니다. 인구 10만도 안 되던 도성이 1천만명이 넘는 거대도시로 바뀌어 거주자의 몰개성을 강요하는 시대가 무서운 때입니다.     © 서문원


4대·4소문 중 가장 온전하게 보존된 창의문. 부암동이 지네형상을 하고 있어 홍예문 윗부분에 닭(봉황)머리 모양의 조각을 해놓은 곳. 서쪽으로 지는 석양 노을이 아름답다는 ‘자하문’의 별명을 가진 성문에서 여행자들은 잠시 땀을 식히며 두 번째 여행을 마쳤습니다.

뒤풀이는 부암동의 가마솥멸치국수집. 막걸리 한잔, 잔치국수 한 그릇을 시켜놓고 ‘사서 한 고생’ 소감을 각자 털어놨습니다. 다비드도 약속을 지켰습니다. 모임은 늘 아쉬움을 남기는 모양. 끝까지 남은 몇은 통의시장을 뒤졌고, 이름난 ‘기름 떡볶이’를 즐겼습니다.

전철 안 40여분. 일행이 있어 교대역까지 수다를 떠느라 곁에 앉은 이 신경 쓸 일이 없었지만, 그 뒤 혼자 앉아있자니 여러 생각이 몰려옵니다. 땀내 나는 곁에 누가 앉을까봐 조마조마 하기도 했고요. 어찌하오리까. 인간이 다 그런 것이니. 조선시대 5백년 아픔을 간직한 시도 하나 떠올렸습니다.

▲ 주산(북악산) 꼭대기에 올라 바라본 서울은 경외였습니다. 인간의 유한함, 그 생명을 지키겠다고 지은 도성만 덩그러니 남은 세월, 조금 더 빨리 움켜쥐겠다고 이웃을 적대시해온 무한경쟁. 산을 내려가면 상처받은 이웃을 따뜻하게 안아줘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촛불 눈물만, 속타는 줄 모르고

“방 안에 켜 있는 저 촛불은 누구와 이별하였기에/ 겉으로 눈물을 흘리며 속 타는 것을 모르는가?/ 저 촛불도 나와 같이 눈물만 흘릴 뿐/ 속이 얼마나 타는지 모르겠구나.” 수양이 왕위를 찬탈한 뒤 단종이 영월로 유배 가는 걸 보며 이개가 읊었다는 싯귀입니다. 단종 복위를 꾀하다 서른아홉에 죽음을 맞이한 사육신. 그가 어찌 살았는지는 모르지만 싯귀는 절절합니다. 서울이 싫어 늘 탈출을 꿈꾸는 여행자. 문득 ‘서울 산다’는 게 뭔지를 되돌아보며 흘리는 회한의 눈물과 조금 닮지 않았을까요?


평화를 사랑하는 최방식 기자의 길거리통신. 광장에서 쏘는 현장 보도. 그리고 가슴 따뜻한 시선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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