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에 이어서> 유흔은 서란을 데리고 여행하는 것을 정옥에게 허락받았고, 정옥은 유흔에게 서란과 함께 여행하려는 이유를 물었다. 혼인 전에 서로 더 알아가고 친해지며 남녀 간의 정을 도모하기 위해서라는 유흔의 말에 정옥은 언짢은 기색을 감추지 않으며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찻잔을 쥔 정옥의 손이 분노로 조금씩 떨리고 있음을 유흔은 여유롭게 바라보았다.
“동생도 알다시피 우리 한씨가에서는 후계혈전 이전의 후계들이 혼인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네.”
“잘 알고 있습니다.”
“한데도 자네가 서란과의 혼인 전에 여행을 통해 남녀 간의 정을 도모하겠다 말하는 것은, 서란이 후계혈전에서 살아남을 것이라는 전제를 바탕으로 말하는 것인가?”
정옥의 말에 유흔은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고작 여행 이야기만 꺼냈을 뿐인데 이리 노골적으로 나오다니. 유흔은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정옥은 머릿속으로 유흔 자신과 서란의 여행이 가져올 이득과 결과를 저울질하고 있을 터였다. 그러니 지금은 정옥 혼자 머릿속으로 무엇을 생각하든 내버려두는 것이 나았다.
“좋네. 내 동생과 서란의 여행을 허락하지.”
“감사합니다, 가주님.”
“이왕 여행 다녀오는 거 좋은 곳이 있으면 많이 가고,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마음껏 하고 오도록 하게. 가내의 일은 너무 걱정하지 말고.”
정옥은 아마 유흔 자신과 서란이 여행을 가 있는 동안 자여의 지지 세력을 모으고, 부상국 이곳저곳에 자여의 이름을 알릴 방법을 마련해야겠다 생각하고 있을 터였다. 아마 시조이신 무녀 훌란의 현신이라고 불리는 서란이 자신의 지지 세력을 버려두고 팔자 좋게 여행을 가 있는 동안이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겠지. 유흔은 정옥의 비어 있는 찻잔에 차를 따랐다.
“해서, 행선지는 어디로 정할 생각인가?”
“소구로 갈까 합니다. 그곳에 장기도가 있으니 배를 타고 유구로 넘어가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요.”
“유구라... 참 좋은 곳이지. 기후도 따뜻하고. 어찌 되었든 잘 다녀오게, 동생.”
유흔이 서란에게 정옥의 허락을 받았다는 것을 전했다. 서란은 즉시, 함께 갈 사람들을 꾸렸다. 둘만의 시간을 보내기 위한 여행이니 따르는 이들이 적어도 의심 받지 않을 것을 감안해 서란은 최소한의 인원으로만 사람을 꾸렸다.
“우리끼리만 간다고?”
서란이 비화와 구향, 소하, 효, 자영, 화요에게 너희들만 따라가기로 했다는 말을 전했을 때, 자영과 화요는 크게 놀랐다. 높은 사람들의 여행이라기에 시위들에 시종들이며 노예들까지 줄줄이 따라가는 것을 생각했는데 자신들만 따라간다니. 그게 정말이냐며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리는 자영과 화요와는 달리, 구향과 소하, 효는 그렇지 않아도 그대를 노리는 사람들이 많은데 괜찮겠냐는 말을 했고, 서란은 괜찮다며 웃어보였다.
“내 곁에 가유 최고의 무사들이 있는데 뭐가 걱정이겠어.”
“가유 최고의 무사?”
“우리가?”
소하와 효의 말에 서란은 그렇다며 한 번 더 웃어보였다. 서란의 말을 곱씹던 구향이 물었다.
“그런데 왜 우리가 가유 최고의 무사지?”
“그야 시조이신 훌란의 현신이라 불리는 나와 겨뤄봤잖아. 시조이신 훌란의 현신으로서 나는 그때 이미 너희들의 실력을 확인했다. 뭐, 이쯤이면 되려나.”
“훗. 그대는 삼백족 무사들과도 겨뤄봤을 텐데 이왕이면 부상국 최고의 무사라고 해주면 어디가 덧나나.”
화요의 농담에 서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영이 그것 보라며 화요의 팔을 꼬집었다.
“그야 그대들이 삼백족 무사와 겨루는 걸 보지 못했으니까. 그대들이 삼백족 무사와 겨루는 것을 보지 못한 나로서는 아직 판단을 내릴 수 없다. 뭐, 이쯤이면 되려나.”
여행할 동안 입을 속옷과 옷가지, 비상식량과 여분의 화살, 그리고 마키리와 검, 장신구와 모포를 챙긴 서란은 마지막으로 자물쇠를 채운 패물함에 든 로사리오 묵주를 꺼내 유흔에게 보여주었다. 유흔은 서란이 보여준 로사리오 묵주를 보고 이것을 어디서 났느냐 물었고, 서란은 데 바옌 부인에게 얻었다고 대답했다.
“부인이 참으로 위험한 짓을 하는구나. 이 부상국에서 가톨릭이 금지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
“하지만 그 위험한 짓 덕분에 내게는 결정적인 패가 생겼지.”
“패?”
서란의 말에 유흔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서란에게 결정적인 패가 생겼다니? 데 바옌 부인이 준 로사리오 묵주로 인해 생긴 패가 무엇일지 생각하던 유흔은 설마, 하고 물었다.
“설마 화야 네가 만나려는 이들이나 전쟁의 방향을 향하게 하려는 곳 중에 가톨릭과 관련된 것이 있는 거야?”
“뭐야, 유흔도 모르고 있었던 거야?”
서란이 깜짝 놀라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유흔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는 서란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았다.
“다루설리네 아버지 말이야, 가톨릭교도였다는데.”
“뭐?”
“하긴, 정황 상 다루씨가에서 작정하고 숨긴 게 분명한데 유흔은 알고 있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한 내가 바보지. 그랬다면 유흔이 그에 대한 계책을 냈을 텐데 말이야.”
경악하는 듯한 유흔의 표정을 살피며 서란이 말했다. 유흔은 서란이 방금 들려준 이야기에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마치 단단한 무언가가 머리를 한 대 치고 지나간 것 같은 충격에 유흔은 후들거리는 손을 애써 숨겨야 했다.
‘저는 라이나라고 합니다.’
또 다시 ‘그’가 떠올랐다. ‘그’. 다시 말해 서란의 아버지. 한씨가에서 철저히 금기시되는 존재. 방금 전 서란의 표현을 빌리자면 한씨가에서 작정하고 숨기는 존재. 그래서 부상국에서는 그 누구도 서란의 아버지에 대해 알 수 없었다. 서란의 아버지가 누구였는지, 어디 출신이었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유란이 한 사내와 동침해 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가 서란이라는 것만 알 수 있을 뿐.
그런데 서란처럼 그 아버지에 대해 가문에서 작정하고 숨겨왔던 자가 또 있었다니. 그리고 그렇게 작정하고 숨겼음에도 불구하고 데 바옌 부인처럼 끝내 그 숨겨진 내막에 다가가는 자가 있었다니. 유흔은 밀려오는 현기증에 이마를 짚었다.
“유흔, 괜찮아? 어디 아파?”
서란이 옆으로 다가와 유흔의 기색을 살폈다. 유흔은 손을 휘휘 내저으며 괜찮다는 시늉을 해보였다.
“괜찮아, 화야. 그냥 조금 어지러워서 그래.”
“정말 괜찮아?”
“응, 괜찮아. 그보다도 그 묵주 한 번 잘 써봐. 데 바옌 부인이 너한테 정말 큰 힘이 되어주시네.”
서란과 유흔은 서로 어디로 갈지 계획을 이야기했다. 어디를 가든 함께였기에 이제 각자 갈 길로 가야 한다는 것이 두렵기는 했지만 이번 일이 끝나면 다시 만날 것이니 이별이 크게 슬프지는 않았다.
“이제 당분간 유흔 못 보겠네.”
“왜? 못 봐서 아쉬워?”
“으응.”
“하지만 화야, 네가 살아남아야 계속 나랑 같이 있을 수 있잖아. 네가 가주가 되어야 나랑 혼인도 하고. 그렇지?”
“응.”
“그러니까 너무 그렇게 아쉬워하지 마. 영원히 헤어지는 것도 아니고 잠시 못 볼 뿐이잖아.”
의심을 피하기 위해 서란과 유흔은 함께 가라고루성문을 나서기로 했다. 가라고루성을 나서면 서란은 그 즉시 비화, 구향, 소하, 효, 자영, 화요와 함께 추연의 수도인 카이성으로 향하고, 유흔은 가유의 서쪽에 있는 소씨가의 본성인 후토성으로 가 배를 타고 소구의 중심지인 장기도로 가기로 했다.
“대신, 카스테라나 좀 사다줘. 거기 카스테라가 그렇게 맛있다며.”
“글쎄, 오는 동안에 상하지는 않으려나.”
“피이.”
혹여 남아 있을지 모를 의심을 불식시키기 위해 유흔은 한 가지 계획을 더 내놓았다. 서란의 어머니 유란이 성문 밖까지 자신과 유흔을 전송한다는 유흔의 계획에 서란은 무릎 위에 올려놓은 두 손을 꼭 말아 쥐었다. 그러나 그 외에는 달리 좋은 수가 없었기에 서란은 마지못해 유란이 자신과 유흔을 전송하는 것에 동의했다.
서란과 유흔이 가라고루성을 나서기로 한 날, 유란은 성문 밖까지 서란과 유흔을 전송했다. 잘 다녀오라는 어머니의 인사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서란은 속옷 끈에 묶어둔 붉은 비단주머니를 떠올렸다. 비단주머니 안에는 아무에게도 들켜서는 안 되는 물건이 들어 있었다.
<다음 글로 이어짐>
<저작권자 ⓒ 인터넷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알바노동자, 여성, 정신장애인, 성소수자. 노동자와 다중소수자라는 정체성 속에서 길어올린 이야기. 해방세상이 와도 탄압받을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댓글
이슬비 오컬트 무협 연재소설 관련기사목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