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에 이어서> 다음날 아침, 잠에서 깬 서란은 어제 만난 그 청년에 대해 아무에게도 묻지 않았다. 슬퍼 보이던 눈동자. 슬프기만 하던 노랫소리. 한없이 슬프고 또 슬퍼 보이던 그의 모습이 떠오를수록 그 모습 위에 자꾸만 유흔이 겹쳐보였다. 서란은 김씨가 시녀들이 가져다준 물그릇을 허겁지겁 들이키며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했다.
“유흔 못 본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이 모양이야.”
애써 스스로를 다잡으며 서란은 김씨가에서 내준 침의 위에 포 하나를 걸치고 처소 밖으로 나섰다. 묶지 않은 긴 머리가 흐트러지며 가슴께에서 찰랑거렸다. 서란은 별원 주위를 산책하며 기암괴석과 인공폭포로 꾸며 마치 산과 계곡의 축소판처럼 보이는 정원을 눈에 담았다. 서인의 취향이 꽃을 좋아하는 자신의 취향과는 참 대조적이구나 하고 느끼는 서란의 뒤로 누군가가 다가와 어깨에 손을 얹었다. 서란은 뒤를 돌아보았다.
“가주님?”
서란은 얼른, 한쪽 무릎을 꿇고 한 손은 꿇은 무릎 위에 올리고, 나머지 한 손은 땅바닥에 늘어뜨리고 고개를 숙였다. 긴 머리가 앞으로 쏟아져 내려와 서란의 얼굴과 시야를 가렸다.
“정원이 마음에 드나 보오.”
서인이 말했다. 서란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마음을 다잡으려 산책을 나왔다가 침의에 포만 걸친 차림으로 서인과 마주치게 될 줄이야. 하여튼 김씨가 놈들 치고 마음에 드는 놈들이 없다고 생각하며 서란은 더욱 더 깊이 고개를 숙였다.
“일어나시오.”
서인이 말했다. 서란은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를 한쪽 옆으로 모았다. 이러면 조금이나마 단정해보일 터였다. 정원을 눈으로 둘러보는 서인을 바라보다 말고 서란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서인의 모습에서 어제 그 청년의 모습이 떠오르는 까닭이었다.
“마치 작은 산과 계곡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습니다.”
“맞소. 삼백족 무가에서는 이렇게 정원을 꾸미는 것이 유행이라 하오. 오랜 전란에 시달리다보니 한 번에 화려하게 피고 지는 꽃보다는 사시사철 변하지 않는 돌이며 침엽수며 인공폭포를 더 좋아하게 될 수밖에 없지 않겠소.”
“혹시 꽃에서 피를 본답니까.”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뜬금없는 말이었다. 서인이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서란을 바라보았다. 서란은 아차, 하면서도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은 주워 담을 수 없는 법. 그러니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서는 애써 말을 번복하려 하기보다는 적절한 다른 말을 찾아 던지는 것이 필요했다.
“사람을 베어낼 때 피가 튀고 흐르고 떨어지는 것이 마치 꽃잎이 흩날리고 지고 떨어지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사람을 베는 것을 두고 검화(劍花)가 피어난다느니 혈화(血花)가 피어난다느니 하는 것이고요. 제가 생각하기에 삼백족 무가의 인물들은 피고 지는 꽃을 보며 칼날 끝에서 피는 혈화를 보는 것 같습니다.”
“그렇소?”
“…….”
“내 생각은 조금 다르오. 권력이란 꽃처럼 한때 피고 지는 것. 그러니 천하의 패권을 위해, 막부의 상국, 정이대장군으로서의 권력을 위해 아등바등 싸우는 것이 한 철 피어 붉어지기 위해 애써 꽃을 피어 올리는 꽃나무와 다를 것이 무엇이 있겠소. 아마 우리 제화족보다 감상적인 삼백족들은 그 사실을 애통해하고 있을 것이오.”
서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키야트 아이누의 여성우월주의적 문화를 버리고 삼백족의 남성우월주의적 문화를 받아들인 김씨가의 가주에게서 이런 말을 들으니 제화족을 삼백족보다 아래로 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서란은 내색하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이 부상국의 선주민이요, 토착민이었던 제화족은 도래인이었던 삼백족과의 전쟁을 통해 대등한 권리를 획득했다. 자치를 보장받았고 제화족의 지배층들이 영지를 얻고 고유문화와 언어를 지켜갈 권리를 보장받았다. 그리고 지금은 상당수의 제화족 무가들이 막부보다 세력이 강한 상태가 아닌가. 그러면 일단은 그것으로 된 것이었다.
‘무엇보다 제화족이 부상국을 일통하고 막부를 세운다면…’
여기까지 생각하다 말고 서란은 하, 하고 헛웃음을 지었다. 제화족의 무가 인물들 중 막부를 세울 인물이 나온다면 그 인물은 누가 되는 것일까. 아니, 그보다 만약 서란 자신이 막부를 세운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자신이 막부를 세운다라. 만약 자신이 막부를 세운다면 그 다음은… 그 다음은 어찌 되는 것일까?
“나는 종종 이 별원에서 산책을 즐기오. 이 별원은 손님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가장 한적하고 조용한 곳에 만들어져 있으니 머리를 식히기에는 더할 나위 없지 않겠소.”
서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까지의 생각을 흘려보내기라도 하듯 서란은 옷깃을 위에서 아래로 매만졌다.
“언제 신씨가로 가실 예정이시오?”
서인이 신씨가로 출발하는 날짜를 물었다. 서란은 말했다.
“엿새 정도 후에 출발할까 합니다.”
“엿새 후라…”
“예, 아무래도 신씨가 가주의 정실부군이 제 친구이다 보니 친구도 만날 겸 가볍게 출발하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서란의 말에 서인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서란은 서인과 나란히 정원을 걸었다. 삼백족이 생각하는 미의식 중 하나를 가감 없이 드러내는 정원 양식은 보면 볼수록 어딘지 모르게 쓸쓸해 보이나 한편으로는 청초해 보이기도 했다. 마치 사비국의 풍속화에 나오는 그네들 지배계층 여인들의 연한 화장 같다고나 할까.
“피부에 자신 있는 여인은 진한 화장을 하지 않소.”
“그렇습니까.”
“이미 피부 자체가 자신의 매력을 드러내주는 수단인데 거기에 다른 것을 더해 무엇 하겠소. 더하면 더할수록 오히려 이상해 보이거나 천박해 보이지 않겠소.”
“…….”
“정원이라는 것도 그런 것이오. 저 중원의 정원 양식을 보시오. 온갖 기화요초를 가져다 놓는다 해도 결국은 눈만 어지럽지 않소. 그러나 이리 소박하게 절제된 정원은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어 정원 자체의 아름다움을 오래오래 눈에 담게 해주는 법. 하니, 나는 이 별원의 정원이 참 좋소.”
“…….”
“마치 그대처럼 말이오.”
서란은 서인의 눈을 바라보았다. 서인이 하하, 하고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대가 김씨가의 사절단을 요청하지 않고 단독으로 신씨가로 가려 하는 것은 신다희를 설득할 자신이 있어서가 아니오. 시간을 사려는 계획, 전쟁의 방향을 동북으로 돌리려는 계획만 가지고도 신다희를 설득할 자신이 있기에 굳이 거창한 사절단이 필요 없는 것이겠지. 그렇지 않소?”
서란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 두 사람 사이로 넘실거렸다. 서란은 바람결에 흐트러지는 머리카락을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아쉽구려.”
“무엇이 말입니까?”
“우리가 같은 가문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그리하여 천하를 두고 다퉈야 한다는 것이.”
“…….”
“후계혈전에서 살아남아 한씨가의 가주가 되거든 그때 우리 제대로 싸워봅시다, 서란. 한씨가의 가주와 김씨가의 가주로서, 가유의 영주와 추연의 영주로서, 키야트 아이누의 여성우월주의적 문화와 삼백족의 남성우월주의적 문화의 수호자로서. 또 무녀 훌란의 후손과 족장 샤쿠샤인의 후손으로서.”
처소로 돌아온 서란은 백연에게 보내는 서신을 한 통 썼다. 서란은 서신에 ‘잠시 가유를 벗어나 여행 중이며 곧 백연 아카포에게 가겠다’는 말 외에 별다른 내용은 적지 않았다.
"오랜만이야, 백연 아카포. 서신을 보내는 것이 조금 늦었네. 나는 현재 가유에 없으니 이해해주기 바라. 내가 가유에 없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싶겠지?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닌가 하고 걱정도 될 테고. 하지만 걱정 마. 나는 매우 평온한 날들을 보내고 있어. 사실, 나 잠시 가유를 벗어나 여행 중이야. 곧 백연 아카포에게 갈게. 제선성에서 만날 때까지 잘 지내."
서란은 서신을 봉인해 효에게 건네주며 제선성으로 가 신씨가의 가주 신다희의 정실남편 신백연에게 건네주라고 말했다. 효가 서신을 품에 집어넣고 방문을 나서는 뒷모습을 지켜보던 서란은 의자의 팔걸이에 두 손을 축 늘어뜨리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아침부터 너무 많은 일을 해서인지 저절로 눈이 감기는 것을 서란은 어쩔 수 없었다. <다음 글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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