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일기를 쓸 때까지만 해도 두 번째 일기가 이렇게 지연될 줄 몰랐다. 1월 내내 방학이니 1~2번 더 쓸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능력이 부족한 것인지, 2편의 기말 에세이 준비와 새 학기 수업 예습하기에 벅찼던 것 같다. 물론, 31일을 꼬박 책 속에 처박혀 있었을 리 만무하다. 유투브로 드라마·영화도 감상하고 여기저기 인터넷 서핑을 하며 시간을 죽이기도 했으나, 뭔가를 끄적이고 싶다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안 나더이다. 에세이 주제를 고민하고 글을 써나가는 데 온 정신을 집중하다 보니, 다른 고민은 할 수 없다는... 헐~
한편의 에세이를 쓰는데 보통 10일에서 2주간의 시간이 걸리다 보니 한 달이 눈 깜짝할 사이이고, 학기가 시작되면 더 정신이 없다. 쉐필드대 정치학 석사과정은 한 학기에 2과목 수강으로, 최소 3과목을 수강해야 하는 다른 학교 보다는 그나마 글을 쓰는데 덜 쫓기는 형편인데, 이렇게 시간을 넉넉히 줄 때는 그만큼의 분석력과 통찰력을 요구하니, 성적표만 놓고 보면 어디가 더 나은 것인지는 모르겠다. 적어도 나처럼 속도가 느린 사람은 쉐필드의 프로그램이 완전 딱이다. 청운의 꿈? 9개월 수업과정 끝~ 5월 18일 금요일. 영어수업을 마지막으로 학교의 모든 수업과정이 끝났다. 청운의 꿈(?)을 안고 설레는 맘으로 학교생활을 시작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모다 마무리되고 이제 논문 제출만 달랑 남았다. 수업 듣고 에세이 8편 쓰느라 학교와 집만 오고 간지 9개월... 시간이 이렇게 지났을 줄 미처 몰랐다. 마지막 수업 때는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언제 또 이런 날이 올까나. 1년이 짧구나.
학부 다닐 때는 이론 수업이 참 재미없다고 생각했는데, 석사과정에 와서는 이론철학만큼 재미있는 것이 없다. 현실에서 겪는 현상들 뒤에 숨어 있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들을 찾는 것이 탐정이 범죄사건을 추리해 나가는 것처럼 흥미진진하다. 신자유주의니, 현실주의니, 마르크스주의니... 옛날엔 머리 아픈, 뭔 소린지 모르는, 먼 나라 사람들의 이야기 같더니, 이것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철학이고 관점이며, 숨어있는 사회 원리들을 밝혀내는데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현미경으로 생물을 관찰하듯 이 이론들을 갖고 세상의 일을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해 보는 것이 흥미롭다. 비록 그 해석이 완벽한 답이 아닐지라도. 그렇기에 학자들이 그렇게도 세상을 들여다보는 새로운 관점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 하는 줄을 이제야 깨닫는다.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 지, 살면서 무엇을 선택할 지, 최대한 주체적(이성적)으로 판단하기 위해... 왜냐하면 그 관점에 따라 우리들의 선택과 그 결과가 크게 달라지니까. 비록, 선택에 따른 모든 결과를 예측할 수는 없어도, 가능한 ‘내’가 의도하지 않는 결과를 줄이기 위해서... 서유럽의 정치철학을 공부하면서 오히려 내가 한국과 아시아의 정치철학에 대해 굉장히 빈약함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서유럽 정치철학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들여다보고 싶었는데, 내 깜냥의 한계로 손도 못 댄 것이 많이 아쉽다. 조만간 꼭 살피리라. 아시아정치철학 몰라 아쉬움 지난 학교생활을 돌이켜 보니, 나를 참 당황스럽게 만들어 오히려 인상 깊었던 두 가지가 생각난다. 하나는 이 학교의 프로그램이 학생의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학습에 많은 비중을 두는데, 자기가 공부해 온 만큼 토론 수업에서 발언하고, 자세하게 질문하는 만큼 교수로부터 구체적인 답변을 얻을 수 있다. 그러니까, 질문이 일반적이고 추상적이면 교수로부터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답변을 받는 거다. 그래서 처음 공부를 시작할 때는 참 많이 당황스러웠더랬다. 뭘 모르니 질문도 추상적이고, 교수님은 ‘니가 모르는 것이 이거’라고 가르쳐 주지도 않고. 헐~ 혼자서 여기 저기 헤매다 학기말이 되어서야 학기 초에 가졌던 질문에 대한 답을 책을 통해 찾았다. 쯥... 그 당시엔 내가 수업료를 왜 냈나 싶었는데, 나중엔 그 좌충우돌 과정을 통해 질문의 답을 찾아가는 방법을 스스로 배운 것에 크게 만족한다. 학문이란,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를 알아 가는 것이라는 깨달음과 함께 말이다. 헐~ 다른 하나는 존 홉슨(John M. Hobson) 교수. 내가 1학기에 수강했던 정치경제이론 수업 담당 교수인데, 세계 정치학의 유럽 중심적 사고를 비판하는 학자이다. 석사 공부를 회상할 때 이 분만큼은 결코 잊을 수 없을 듯하다. 두 번의 에피소드가 있었는데, 한번은 이 분의 학자와 교수로서의 소양에 대해 심히 의심을 품었던 것이고, 다른 한번은 정반대로 이 분을 존경하게 된 사건이다. <에피소드 1> 홉슨 교수가 지난 1년 석사과정 프로그램 운영 책임을 맡은 데다 책 출판을 준비하느라 무지하게 바쁘셨던 모양이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한 교수가 담당 교수들이 귀찮아하더라도 안면몰수하고 쫓아다니라고 조언해 이를 충실히 이행(?)하고자 그리하며 여러 차례 질문 공세를 펼쳤는데, 매번 바쁘다며 질문을 중간에 끊질 않나, 답변이 ‘짧기’ 그지없었다. 아니, 뭐, 이런….-,.-;; <에피소드 2> 정치경제이론 수업을 듣는 친구들 중에 독일과 영국 출신의 똘똘한 두 학생이 있었는데, 유럽의 아프리카 개발 정책에 대해 학부시절에 공부를 많이 했는지,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을 두고 교수와 종종 수업시간에 격렬한(?) 토론을 벌였다.
총 12번 수업 중 6번의 수업이 매번 이 주제에 대한 그들만의 토론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이론을 현실에 적용하는 토론이기 때문에 듣는 것만으로도 나름 유익할 수 있는데, 문제는 서유럽권 학생들과 달리 아프리카에 대한 지식이 거의 전무(全無)한 비(非)서유럽권 학생들은 들어도 뭔 소린 지 모른다는 거였다. 헐~ 스스로 공부 안하면 수업 ‘꽝’ 처음엔 뭔 소린지 못 알아들어서, 다음엔 아프리카를 모르는 자신을 탓하며, 교수가 차츰 알아서 배려해주겠거니 고대하며, 그렇게 찍 소리 못하고 끌려갔는데, 수업이 8주, 9주차에 이르러서 우리는 깨달았다. 교수가 먼저 배려해 줄일 없다는 것을. 헐~ 아니, 유럽 중심주의 비판한다던 학자가 이게 뭐고. 10번째 수업이 끝나던 날, 기말 에세이 상담 받으러 갔던 차에 결국 한마디 하고 말다. "그런데, 교수님, 수업에 대해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서유럽 학생들 중심의 토론내용 때문에 다른 친구들이 토론에 참여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네요. 그 친구들의 적극적인 질문과 토론을 막으라고 할 수는 없지만, 한쪽으로 치우진 토론 주제를 조정해 주시거나, 최소한 그 친구들의 질문과 토론의 요지를 수업 내용과 연계해 주시면, 관련 내용을 모르는 학생들도 맥락을 이해할 수 있을 텐데, 그런 것이 없으니, 배제 당한다는 느낌입니다. 교수님도 학생들이 그런 기분 드는 것을 원하는 것은 아니지 않나요?" 다른 때는 버벅 대던 영어가 그날따라 청산유수였다. 교수도 눈이 동그래졌다. 원래 홉슨 교수가 학생이 하는 말을 끝까지 다 안 듣는 경우가 많은데, 그날따라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끝까지 경청했다. 홉슨 교수는 “본의 아니게 미안하다”며, “왜 이제야 그런 얘기를 하냐”고 물었다. 그래서 난 영국 문화를 잘 몰라서 판단하기 어려웠던 데다, 좀 더 시간이 지나면 시정되겠지 생각했고, 그리고 아시아 문화에서는 교수한테 감히 수업방식에 대한 불만을 직접 얘기하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그나마 나는 시민운동을 했던 사람이라 늦었지만 앞으로라도 수업을 들을 학생들, 특히 아시아 학생들을 생각해 말해야겠다 싶어 하는 말이라고 쏘아대곤 나왔다. 으이구, 이놈의 오지랖…ㅍㅎ 당초 홉슨 교수의 평상시 행동 때문에 다소 비판적인 생각을 갖고 있던 차라 큰 기대는 안하고 다음 수업에 들어갔는데, 홉슨 교수가 나를 비롯해 학생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다. 수업을 시작하기 전 학생들에게 그 동안 자신의 미흡한 수업운영으로 일부 학생들이 소외감을 느꼈다면 정말 미안하고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고 공개적으로 사과를 한 것이다. 흡슨 교수에 대한 의심과 존경 그 동안 유럽 중심적이고 권위적인 사람이 아닌가 비판적으로 생각했었는데, 이 한방의 사과로 나의 편견이 완전히 뒤집어졌다. 보통 학생들한테 자신의 수업방식에 대해 대놓고 사과하는 교수를 보기란 쉽지 않은데 말이다. 이렇게 학생의 비판을 경청하고 자신을 낮출 줄 아는 학자를 또 만날 수 있을까?
지난 4월 초 홉슨 교수의 신작 ‘세계 정치학의 유럽중심주의(The Eurocentric Conception of World Politics)’가 마침내 출간되었다. 출간되자마자 책을 구입했는데, 이 학교를 떠나기 전에 저자 사인을 받아가야지. 이제는 팬이 되었다. 비록, 학생들의 질문을 중간에 끊는 급한 성질은 여전하시지만. 헐~ 논문 마감 4개월을 남겨 두고 주제의 개요를 잡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지도교수의 조언을 들을 수 있는 기회는 최소 3번. 잘 활용하는 학생들만이 만족할 만한 논문 성적을 받을 수 있을 게다. 작년에는 ‘최우수(Distinction)’ 성적을 받은 학생이 100명 중 달랑 1명뿐이었단다. 또한, 다수가 ‘우수(merit)’도 아닌 ‘통과(pass)’ 성적을 받아 들고 졸업을 했다 하니, 논문 작업이 만만치 않아 보인다. 논문이 60학점짜리이니 박사과정 진학을 고려하는 친구들은 스트레스가 이만 저만이 아니다. 참고로, 영국은 최우수(70점 이상)-우수(60~69점)-통과(50~59점)-낙제(50점 미만) 세 단위로 평가한다. 보통 학점 평균 65점 이상 되면 옥스포드, 캠브리지 등 유수의 대학원에 지원할 자격 조건이 된다. 그러니까 70점 이상 받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고, 특히 기준이 까다로운 졸업논문에서 ‘최우수’성적을 받았다는 것은, 정말이지 똘똘한 놈인 게다. 비영어권 국제학생이 ‘최우수’ 성적을 받았다면 이는 정말 엄청난 사건이다. 헐~ 나? 나는 이 세상의 모든 범인(凡人)들을 대표한다. 그러므로 ‘최우수’ 성적 따위는 기대할 수 없다. 그저 최선을 다할 뿐…ㅍㅎ. 지난 3월 제출한 논문 계획안을 최근 바꾸기로 결정했다. 지구환경정치 기말 에세이를 ‘사회주의(socialism)와 환경의 공존 가능성’을 주제로 이론적인 검토를 했는데, 글자 수 제한으로 담지 못한 것들이 많아서 논문을 통해 완전히 마무리 해야겠다는 생각이다. 내일 모레 지도교수와 첫 번째 미팅을 갖기로 했는데, 방향만 대강 정해지고 구체적인 개요는 아직 잡히지 않아 첫 미팅이 그냥 홀랑 날아가게 생겼다. 젠장... 논문마감 -4개월, 최선 다할뿐... 필요한 자료를 수집하면서 목록을 짜고 있는데, 이것들을 대충이라도 훑어 봐야 개요가 짜질 듯. 그러려면 두 번째 미팅은 6월 중순 이후로 잡아야 하나? 4개월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막상 시작하니, 어휴 짧다. 4개월 동안 또 다시 방콕을 면치 못하겠구나. 영국에 와서 쉐필드 바깥으로 나가본 적이 없다. 돈도 없고, 정신적 여유도 없고. 쳇. 너무 오랜만에 일기를 써서 그런지 글이 길어진다. 그러니까 뭐든 미루면 안 되는 것인데. 헐~ 오늘도 어김없이 잠깐 해가 나왔다가 흐리고 바람이 분다. 3월 한 달을 제외하고 지금까지 20도를 밑도는 기온에 햇빛 보기가 힘들다. 도대체 영국에 따뜻하고 화창한 봄날은 오는 것인가? 쯥. 9개월 내내 입어 온 니트 코트를 벗어 던져 버리고 싶다. 에고고…-,.-;; <저작권자 ⓒ 인터넷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대초원에서 유라시아 환경보고서를 띄우던 경효. 인도네시아에서 시작해 말레이시아, 태국, 버마, 캄보디아로 1년여 장도의 동남아시아 자원봉사활동을 하며 기행문을 써온 제가 이번엔 영국 쉐필드에 왔습니다. 쉐필드대학 석사과정에서 공부하려고요. 이젠 유학일기로 관심을 좀 끌어볼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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