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가주는 주군은 오직 그녀 한 사람뿐이다"

[연재소설] 홍매지숙명(紅梅之宿命) 피다, 15장 임의침묵(15-2)

이슬비 | 기사입력 2018/01/26 [10:22]

"나의 가주는 주군은 오직 그녀 한 사람뿐이다"

[연재소설] 홍매지숙명(紅梅之宿命) 피다, 15장 임의침묵(15-2)

이슬비 | 입력 : 2018/01/26 [10:22]

제15장 임의 침목(15-2)

<지난 글에 이어서>

저희들 중에는 제화족인 이들도 있지만, 삼백족인 이들도 있습니다. 이것은, 이를 고려하시어, 삼백족식으로 꾸며진 요리집에서 저희를 맞아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입니다. 사양치 말고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향화라는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큰절을 하며, 머리 위로 커다란 함 하나를 받쳐 들었다. 유흔은 함을 열어보았다. 함 안에는 유구에서 생산되는 조후 몇 필과 진주 반 됫박, 그리고 여러 가지 패물들이 한가득 들어 있었다.
 
기쁘게 받겠소.”
 
유흔은 그중, 서란에게 어울릴법한 노리개 하나를 집어 들고는, 이것은 조카에게 어울릴 것 같다며 향화의 안목을 칭찬했다.
 
호호호. 공자님께서 아가씨들을 많이 아끼시는 듯합니다?”


아니, 자여와 윤희 말고, 서란 말이오.”
 
조카라. 유흔은 향화를 바라보며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이 서란의 편에 있다는 것은 부상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자신의 앞에서 자여와 윤희까지 거론하는 것은 서란이 금족령에 처해져 있음을 간접적으로 비웃는 것일 터였다.
 
유흔은 술잔을 높이 들어올렸다. 유흔이 먼저 술잔을 입에 털어 넣고, 자리에 모인 이들이 모두 술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유흔은 술잔에 다시 술을 채우며 상인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눈으로 찍듯이 바라보았다. 지금 이들은 서란을 비웃고 있었다. 그러나 훗날, 서란이 한씨가의 가주, 이 가유 땅의 영주가 되었을 때에도, 지금처럼 서란을 비웃을 수 있을까?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유흔은 다시 술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훗날, 서란이 한씨가의 가주, 가유의 영주가 된다면 그때는 서란을 비웃었던 이자들을 반드시 추국청에 잡아넣으리라. 어떤 꼬투리를 잡아내서라도, 어떤 혐의를 뒤집어씌워서라도 추국청에 잡아넣어, 가주로서의, 영주로서의 서란의 위엄을 세우리라.
 
내 조카는 자여와 윤희가 아니다. 아니, 나의 가주는 자여도, 윤희도 아니다. 나의 가주는, 나의 영주는, 그리고 나의 주군은 오직 단 한 사람뿐이다. 카무라 프리 샤르휘나. 새벽의 광명. 나의 가주는. 나의 영주는, 그리고 나의 주군은 오직 그녀 한 사람뿐이다.’
 
유흔은 또다시 잔에 술을 채웠다. 지금쯤이면 보현이 윤희의 목숨을 앗아갈 준비를 끝내고 있을 터였다.
 

 
이 술은 저희 도련님과 유란님께서 특별히 내리시는 술입니다.”
 
한편, 보현은 상인들이 데리고 온 하인들과 일꾼들, 그리고 노예들에게 푸짐한 술과 안주를 한 상 가득 전하고 있었다. 커다란 교자상 위에는 북해도에서 잡히는 연어로 만든 다양한 요리들과, 고기 산적들, 그리고 색이 예쁜 과일들과, 과자들이 한가득 차려져 있었다. 보현은 유흔의 노예들과, 유란의 노예들을 시켜 안주상을 줄줄이 들고 오게 했다.
 
술과 안주는 얼마든지 있으니 많이 드십시오.”
 
보현은 커다란 동이에서 국자로 술을 떠 큰 병 여러 개에 나누어 담았다. 맑은 빛깔의 술이 동이에서 병으로 옮겨지는 것을 지켜보는 하인들과 일꾼들과 노예들이 저마다 눈을 빛내며 군침을 삼켰다.
 
많이 드십시오.”
 
보현은 이 사람 사이에서 저 사람 사이로 오가며 부지런히 술을 따르고, 안주를 권하고, 안주는 입에 맞는지, 술은 입에 맞는지를 끊임없이 물었다.
 
술이 몇 순배 돌고, 커다란 술동이가 서너 개 정도 비워지고, 술에 취한 하인들과 일꾼들과 노예들이 자리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바닥에 누워서 코를 골고, 상에 고개를 처박고 코를 골기 시작했다.


이들이 정말 잠들었는지 하나하나 확인하던 노예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현은 유흔 소속의 노예장 투웨에게 지시했다.
 
혹시 모르니 오늘 사용한 접시와 술동이, 그리고 술잔과, 나머지 식기들을 깨끗이 씻어놓아라.”


.”


그리고 남은 음식들은 모두 내다버리도록. 알겠느냐?”


, 알겠습니다. 보현님.”
 
노예들이 접시와 술동이, 술잔과, 식기를 서둘러 수레에 싣고, 남은 음식들을 보자기에 싸는 동안, 보현은 품속에 숨겨두었던 자리공을 꺼내어 산머루 사이에 섞어놓았다. 이제 윤희의 목숨은 산머루 사이에 섞인 자리공을 얼마나 먹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이리라.
 
보현은 유란 소속의 노예장 산이에게도 일러, 오늘 사용한 산조인가루를 모두 태우도록 했다. 산조인은 수면제로 쓰이는 약재인 만큼, 발각될 시, 서란이 윤희의 목숨을 노렸다는 사실이 드러날 수밖에 없을 터였다.
 
노예들이 끌고 가는 식기수레를 보며 보현은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한씨가의 제3후계 한서란, 이제부터 한씨가의 제2후계 한서란이다.”
 

 
산머루 속에 섞인 자리공의 양은 치사량을 넘기고도 남을 정도였다. 그리고 정옥은 윤희 외에는 누구도 산머루에 손대지 못하게 했고, 그로 인해 혼자 산머루를 실컷 먹을 수 있었던 윤희는 치사량을 넘기고도 남을 만큼의 자리공 또한 모두 먹고 말았다.
 
윤희가 두통과 고열, 설사와 복통, 구토에 시달리다 숨을 놓은 그날, 유흔은 서란의 옷들 중에서 가장 예쁜 옷을 꺼내어, 서란에게 입혀주었다. 밝은 노란색 바탕에 은매화가 수놓인 그 옷은 서란의 하얀 얼굴을 더욱 돋보이게 해주었다.


유흔은 서란의 머리를 빗기고, 양옆에 두 가닥을 땋아 늘어뜨려 진주로 만든 꽃 모양 장식을 달아주고, 나머지 머리를 인두로 더욱 곧게 펴주었다. 서란은 패물함에서 진주로 만든 나비 귀고리를 꺼내 달고 꽃과 나비가 새겨진 진주반지를 꼈다.
 
모든 단장을 마친 서란은 유흔의 뒤를 따라 처소의 문턱을 넘었다. 이제 곧 2후계가 될 서란에게 모든 시종들과 노예들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서란은 저 멀리에 서 있는 보현을 바라보았다. 서란과 눈이 마주치자 보현이 깊이 고개를 숙여 목례를 건넸다.
 
서란이 한 발자국씩 걸음을 옮길 때마다, 도열해 있는 시종들과 노예들이 일어나 뒤를 따랐다. 자신과 유흔의 모든 시종들과 노예들을 거느리고 길을 나선 서란은 긴 회랑들을 지나 가주의 처소 앞에 다다랐다.
 
서란은 긴 복도를 지나 가주의 침실 앞에 섰다. 서란의 모습을 알아본 시녀 하나가 얼른, 고개를 숙여 목례를 건넸다. 서란은 시녀에게 명령을 내렸다.
 
안에 고해라.”


아가씨……?”


무엇하느냐. 안에 고하지 않고.”
 
서란의 목소리에는 어느덧 위압감이 실려 있었다. 서란의 목소리에 실린 위압감을 느낀 것인지, 시녀가 얼른, 목청을 가다듬고 큰 소리로 서란과 유흔의 방문을 알렸다.
 
가주님, 서란 아가씨와 유흔 도련님께서 드셨습니다.”


들라 해라.”
 
정옥의 목소리에는 깊은 침통함과 함께, 여느 때보다 한층 더 짙은 침잠함이 배어 있었다. 서란은 유흔과 함께 방문을 들어섰다. 침실 안에서는 정옥이 침의 차림으로 자리에 앉아, 시녀들에게 단장을 받고 있었다.
 
그래, 소원성취는 잘 하였느냐? 네가 바라던 대로 금족령에서 풀려났지 않느냐. 이제 곧 제2후계가 될 테고 말이다.”


, 가주님.”


일곱 살 이전의 어린아이의 죽음은 하등 슬퍼할 이유가 없는 일. 윤희는 내 가슴에 묻었다. 그러니 너도 더 이상 그녀를 기억하지 마라.”
 
말을 마치며 정옥은 손을 휘휘 저어 서란과 유흔을 방 안에서 나가게 했다. 그 모습이 마치 너만은 절대로 가주가 되지 못 하게 하겠다는 다짐인 것만 같아 서란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 글에 계속>

알바노동자, 여성, 정신장애인, 성소수자. 노동자와 다중소수자라는 정체성 속에서 길어올린 이야기. 해방세상이 와도 탄압받을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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