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몰아치는 격동의 세월 난세에 파란이 이누나

[연재소설] 홍매지숙명 피다, 제20장 혈염산하(血染山河)(20-2)

이슬비 | 기사입력 2018/07/15 [11:53]

휘몰아치는 격동의 세월 난세에 파란이 이누나

[연재소설] 홍매지숙명 피다, 제20장 혈염산하(血染山河)(20-2)

이슬비 | 입력 : 2018/07/15 [11:53]

<지난 글에 이어서> 

아니야, 나는 저 고깃덩이가 아니야!’

 

그러나 아무리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어도 서란의 몸에서는 그을음냄새가 지워지지 않았고, 잘 아물어가던 상처도 덧난 것인지 밤마다 눈가에서 피가 흘렀다.

 

서란은 이제 잠을 잘 수 없었다. 전투가 벌어질 때에도, 그렇지 않을 때에도 귓가에는 항상 석포에 맞은 성벽이 무너지는 소리며, 하늘에서 화살비가 쏟아져 내릴 때의 바람소리가 맴돌았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원망스럽고, 그런 자신을 원망할 수밖에 없는 스스로 때문에 서란은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 눈물을 삼켜야만 했다.

 

그렇게 두려움과 아픔으로 차츰차츰 무너져가고 있던 어느 날, 서란은 마침내 검붉은 피를 한 움큼 토했다. 제대로 아물지 않은 마음이 한 움큼 핏덩이가 되어 떨어져 나왔다.

 

 

하하하. 별안간, 서란은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손가락으로 입을 훔쳐보자, 붉은 피가 선명하게 묻어나왔다.

 

서란은 자신이 토해낸 검붉은 핏덩이를 바라보았다. 다섯 살 어린 날, 제 어미의 손으로 건네진 독을 삼켰을 때에는 피가 이리 굳지 않았는데. 어쩌면 이 나고현성이 그날 제 어미가 자신을 해하려 했던 독보다 더 지독한 독이었나 보다 생각하며 서란은 미친 듯이 웃었다.

 

한동안 미친 듯이 웃던 서란이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자리에서 일어나 자물쇠에 손을 댔다. 무언가를 결심한 듯이 굳은 얼굴로 한참 자물쇠를 만지작거리던 서란이 근처에서 나무 막대기 하나를 주워왔다. 서란은 자물쇠를 내리치기 시작했다. 나무막대에서 거스러미가 일고, 일어난 거스러미가 손바닥이며 손가락에 박혔지만 서란은 자물쇠를 내리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거기 뭐야!”

 

무슨 일이야!”

 

다른 쪽에서 경계를 서던 병사 서넛이 서란을 향해 다가왔다. 서란은 허리에 맨 전동에서 화살을 꺼내 시위에 끼웠다. 엄지손가락에 깍지를 낀 손이 턱에서 귀 옆까지, 시위를 팽팽히 당기며 지나갔다. 서란은 곧 활시위를 세게 당겼다 놓았다.

 

! 하는 소리와 함께 첫 번째 병사가 쓰러지고, 서란은 두 번째 병사를 향해 활시위를 당겼다. 두 번째, 세 번째 병사가 연이어 쓰러졌다. 서란은 나머지 병사를 향해 마키리를 던졌다. 마키리는 병사의 심장에 정확히 날아가 꽂혔다.

 

자물쇠가 부서진 문을 연 서란은 방바닥에 피 묻은 마키리를 던져놓았다. 방 안에 있던 이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란을 바라보았다. 서란은 한 마디 한 마디 찍어내듯, 그러나 그 한 마디 한 마디를 아주 침중하게 내뱉었다.

 

가자.”

 

…….”

 

가자고.”

 

…….”

 

모두 나가서 함께 싸우자고.”

 

…….”

 

왜들 이래? 왜들 이렇게 나약해? 우리는 키야트 아이누야. 키야트 아이누의 길은 오직 하나, 싸워서 살아남는 길밖에 없어.”

 

…….”

 

여기 이대로 앉아서 죽을 날만 기다리는 건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아. 아니, 키야트 아이누에게 어울리지 않아.”

 

…….”

 

그러니 당신들이 정말 키야트 아이누라면 나와 함께 나가자. 나가서 함께 싸우자. 함께 싸워서 살아남자.”

 

…….”

 

그게 아니라면, 다들 지금 여기에서 죽어버리자. 차라리 그게 키야트 아이누다운 최후일 테니까.”

 

말을 마치며 서란은 방바닥에 꽂힌 마키리를 뽑아 자신의 목에 가져다댔다. 쇠붙이의 서늘한 느낌과 함께 뜨뜻미지근한 액체가 흘러내렸다. 서란은 방 안에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노려보며 노래를 불렀다.

 

휘몰아치는 격동의 세월

난세에 파란이 이는구나

뜨겁게 흘렸던 피 그 누가 알아주리

 

붉은 불꽃으로 천하를 평정하길 바랐건만

고운 얼굴을 두고 먼 길을 떠나왔으니

남은 생에 미련을 두어 무엇하리

 

저 높은 하늘 아래 내 기개만은 여전하니

차디찬 마음으로 모든 어둠을 몰아내리라

전장을 휩쓸던 활은 덩그러니 벽에 걸려 있고

아득한 정복의 꿈 갑옷에 한기가 서렸구나

마음 속 깊이 새긴 뜻은 청산으로도 가릴 수 없어

그림같이 펼쳐진 강산은 내 드높은 이상이로다

 

창칼이 난무하는 세상 그 누가 막을 것인가

정의를 위해 싸웠던 젊은 날의 영웅이여

홀로 외로이 돌아서니 전쟁의 불씨는 사라지고 없구나

천추에 남을 이름이여 후세에 길이 남으리라

다시 불어온 바람에 옛 구름이 걷힐지니

 

지금 서란이 부르는 노래는, 샤쿠사인을 죽인 직후, 무녀 훌란이 아이누답게 다 같이 살든가, 다 같이 죽는 길을 택하자며 키야트, 오와손, 오도이, 아이누 전체를 설득하며 불렀던 노래였다.

 

…….”

 

일어나세. 모두들 일어나.”

 

저 어린아이가 우리를 부끄럽게 하고 있잖은가. 모두들 일어나세. 일어나.” 

나이 지긋한 노인 몇을 필두로, 방 안에 있던 이들이 모두 일어나 방문을 넘기 시작했다. 방문을 넘다 말고, 노인들이 서란을 향해 물었다.

 

혹시 말이다. 유흔 도령이 이번에 열한 살 난 제 조카를 데리고 왔다던데 혹시 그 아이가 너인 것이냐?”

 

한 노파의 말에 서란은 살짝 웃으며 눈을 감았다. 붉은 피가 맺힌 칼날이 목에서 내려지고, 서란의 입술이 서서히 열렸다.

 

그래. 내가 한서란이야.”

 

아가씨.”

 

노파가 서란을 불렀다. 서란은 노인을, 그리고 방문을 넘은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고맙습니다.”

 

…….”

 

잠시나마 꿈꾸게 해주셔서.”

 

노파가 서란에게 큰절을 올렸다. 삼백족 식으로 손을 모아 이마에 대고 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리는 것으로 보아, 노파는 한때 삼백족이었던 모양이었다.

 

방문을 넘은 이들이 각 방마다 달려가 자물쇠를 부수고, 사람들을 일으키고 있었다. 서란은 마키리를 칼집에 집어넣고, 검을 빼들었다. 시험 삼아 검을 여러 번 돌리며 서란은, 뒤늦게 사태를 파악하고 달려오는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싸우다 죽겠다는 사람들을 어찌 막으려고……?”

 

지검대적세. 방문을 나선 서란은 발을 어깨 넓이로 벌리고 서서, 뒤를 향해 왼쪽 어깨에 비스듬히 검을 맸다. 탁 트인 공간에서 여러 사람을 상대하기에 알맞은 본국검법의 제1세였다.

알바노동자, 여성, 정신장애인, 성소수자. 노동자와 다중소수자라는 정체성 속에서 길어올린 이야기. 해방세상이 와도 탄압받을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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